<19> 이탈리아 '지디 바이라(G.D. Vajra)'
피에몬테 최고급 와인 '바롤로' 생산자
포스트 모더니스트 면모 보여준 '알베'
'키에'…잊혀진 고품종 프레이사 되살린 기념작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It's forbidden to forbid!)"
1968년 5월, 전 세계는 인종주의와 성차별, 반전(反戰), 환경오염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부조리에 맞서 시대의 변화를 촉구하는 68운동의 열기로 가득했다. 68운동의 물결은 프랑스를 넘어 이탈리아까지 확산했고, 피에몬테주(州)의 중심도시 토리노 시내에도 사회 변혁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품은 학생 시위대로 넘쳐났다.
열다섯의 알도 바이라(Aldo Vaira)도 시위대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거대한 사회운동인 68운동은 정부를 향한 시위대의 요구가 충분히 관철되지 않으면서 단기적으로 실패하는 모양새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후 다양한 사회 개혁의 사상적·정신적 토대로 작용하며 20세기 후반 정치·사회·문화적 지형의 전면적 변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종국엔 성공한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알도의 68운동도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그가 품고 있던 변화에 대한 열망은 다른 방향으로 표출, 종국엔 혁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탈리아 '와인의 왕'으로 불리는 바롤로 지역 와이너리 창립자인 알도는 68운동 당시 국방부 소속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게 붙잡혀 조부모가 살던 피에몬테의 작은 마을 바롤로(Barolo)로 보내진다. 도시 소년에게 강제 유배와 다름없던 조치였지만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조부모의 농장에서 여름을 보낸 알도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큰 감명을 받았고, 포도나무와 들판 사이에서 보내는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1970년대 이탈리아 농촌의 청년들은 도시로 떠나고 있었다. 알도의 귀농은 시대의 흐름과 반대되는 결정이었고, 가족들이 우려를 내비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알도의 뜻은 굳건했다. 1971년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유기농·자연주의적 농법을 지향하는 '토양과 건강(Suolo e Salute)'이라는 모임에서 활동하며 바롤로 지역에 친환경 농법을 도입하는 선두주자 역할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듬해인 1972년, 알도는 '지디 바이라(G.D. Vaira)'라는 이름을 내걸고 와이너리 운영을 시작한다. 아버지 주세페 도메니코 바이라(Giuseppe Domenico Vaira)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1972년은 알도와 바롤로 모두에게 기억에 남는 해였다. 그해 바롤로 지역 작황은 역사에 남을 만큼 좋지 못했고, 젊은 양조가에게도 첫 빈티지는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그럭저럭 간신히 와인을 만들어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무엇보다 와인 라벨에 브랜드명이 'G.D. Vaira'가 아닌 'G.D. Vajra'로 잘못 인쇄되는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지출을 한 알도는 이를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와인을 출시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알도가 이후에도 오타를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우연히 발생한 실수를 새로운 혁신의 계기로 삼기로 하고 오타인 제이(j)가 들어간 '지디 바이라(G.D. Vajra)'를 밀어붙였고, 지금까지 50년 이상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자존심 '네비올로'
지디 바이라가 자리 잡은 피에몬테 지방의 바롤로 와인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베네토(Veneto) 지방의 '아마로네(Amarone)'와 더불어 흔히 이탈리아의 3대 와인으로 꼽힌다.
'산기슭'이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 북서부의 피에몬테는 알프스 자락에 있다. 언덕과 산이 알프스에 겹겹이 둘러싸인 탓에 피에몬테의 포도밭 중 평지로 공식 분류되는 곳은 5% 이하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포도밭은 방향과 입지조건, 고도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에 맞는 품종을 고르는 일도 중요해졌다.
피에몬테는 프랑스의 부르고뉴(Bourgogne)와 여러 면에서 궤를 같이하는 지역이다. 두 지방의 와이너리 모두 작은 규모와 세심한 관리가 특징이며, 수 세기 동안 가톨릭 베네딕토회의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와인 전통이 형성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두 지역은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데, 해당 지역에서 최적화된 단일 포도 품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부르고뉴는 피노 누아(Pinot Noir)를, 피에몬테는 네비올로(Nebbiolo)를 선택했고, 지금까지 위대한 와인들을 만들고 있다. 두 지역의 선택을 받은 두 품종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와인의 섬세함과 우아함을 대표하는 품종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네비올로는 이탈리아어로 안개라는 뜻의 '네비아(Nebbia)'에서 유래했다. 잘 익은 네비올로 껍질에서 유독 많이 발견되는 흰 분이 마치 안개처럼 보여서 네비올로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고, 수확기 피에몬테 지역을 뒤덮는 가을 안개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네비올로는 피에몬테에서 재배하는 다른 품종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싹을 틔우지만 10월 말까지 기다려야 충분히 익는 만생종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피에몬테 지역에선 네비올로를 심을 때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구릉지, 그중에서도 남서향 포도밭을 선호한다.
네비올로는 수확량이 피에몬테 전체 포도 재배량에서도 15%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많지 않고, 피에몬테를 제외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곳에서 빚어낸 고혹적인 자태의 와인에 적합한 고품질의 포도를 성공적으로 생산해낸 곳이 사실상 없다. 그만큼 네비올로는 이탈리아의 자존심과 같은 고귀한 포도다. 네비올로로 만든 와인은 선명한 루비색을 띠며, 옅은 색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는 강한 타닌이 입안을 감싸지만 나이가 들면서 기품 있는 장미와 타르 등의 아로마와 풍미를 갖춰간다.
이러한 네비올로 품종으로 가장 명성이 높은 곳이 바로 바롤로다. 바롤로 와인은 100% 네비올로 품종으로 만들어지는데, 바롤로는 마을 이름인 동시에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의 명칭이기도 하다. 바롤로의 포도밭은 주로 해발 300~500m의 남향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 고도로 인해 포도가 서서히 완숙돼 체리와 허브, 장미 등의 아로마를 발현한다. 바롤로는 규정상 양조 후 최소 38개월 동안 숙성해야 하며, 이 중 18개월은 오크 숙성을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
'제비꽃 언덕'서 빚어낸 바롤로
지디 바이라의 대표 와인도 역시 네비올로로 만든 바롤로다. 이 가운데 '지디 바이라 바롤로 브리코 델레 비올레(G.D. Vajra Barolo DOCG Bricco delle Viole)'가 와이너리의 대표작이다.
피에몬테의 최상급 보도밭에는 '브리코(Bricco)'라는 이름이 많이 붙는다. 이는 이 지역 방언으로 '햇볕이 잘 드는 언덕 꼭대기'라는 뜻이다. '제비꽃 핀 언덕'이라는 의미를 담은 '브리코 델레 비올레'는 바롤로 마을 서쪽 끝에 위치해 있고, 해발 400~480m에 걸쳐 있어 지디 바이라의 포도밭 중 가장 높고 알프스에 가깝다. 이 밭은 알도 바이라가 처음 포도 재배를 시작한 포도밭으로, 그는 이 밭을 두고 "우리에게 인내심을 가르쳐 주고, 지디 바이라 양조 스타일의 틀을 구축하게 해준 밭"이라고 평가하며 특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브리코 델레 비올레는 서늘한 고도로 포도가 천천히 완숙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아주 섬세한 캐릭터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네비올로가 생산된다. 바롤로 브리코 델레 비올레는 잘 익은 자두와 블랙체리 향이 약간의 미네랄 터치와 함께 굳건하고 파워풀한 타닌의 맛이 느껴진다. 지디 바이라의 바롤로 중 강인하고 남성적인 스타일을 지닌 와인으로 평가된다. 완벽하게 익은 네비올로 포도의 맛과 이를 뒷받침 해주는 산도의 균형감이 뛰어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생산량도 연간 1만2000병 정도로 많지 않다.
'지디 바이라 바롤로 알베(G.D. Vajra Barolo DOCG Albe)'는 조금 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바롤로로 꼽힌다. 지디 바이라의 바롤로 가운데 가장 어릴 때 마시기 좋은 우아한 스타일의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바롤로 알베는 피에몬테 지방의 전통적인 양조법에 따라 큰 슬로베니아 오크통에서 숙성시키고 산뜻한 산미와 꽃향, 생동감 있는 타닌과 과일 맛의 균형을 염두에 두고 만드는 와인이다. 과일 향이 풍부하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골격과 긴 여운을 느낄 수 있으며, 빈티지에 따라 10~20년 이상 숙성 가능하다.
특히 바롤로 알베 2020 빈티지는 지난해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이목이 쏠리는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의 ‘올해의 100대 와인’ 에서 9위를 차지했다. 이는 3위에 오른 안티노리 티냐넬로 2021(Antinori Toscana Tignanello)에 이어 이탈리아 와인 중 두 번째로 높은 순위고, 바롤로 중에선 가장 높다.
혁신의 DNA…잃어버린 품종을 찾아서
혁신을 꿈꿨던 알도는 네비올로를 활용한 바롤로 와인 양조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피에몬테의 생산자들은 우수한 떼루아를 지닌 포도밭에 주로 고급 품종인 네비올로만 심었다. 양질의 땅에 고품질의 포도를 심었을 때 부가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도는 우수한 떼루아의 작은 포도밭 구획을 의미하는 'MGA(Menzioni Geografiche Aggiuntive)' 인증을 받은 포도밭에 지역의 토착 품종인 돌체토(Dolcetto)와 바르베라(Barbera)를 재배해 해당 품종으로 양조한 와인의 품질도 끌어올렸다. 이밖에 피에몬테 지역에선 최초로 독일 청포도 품종인 리슬링(Riesling)을 식재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지디 바이라는 프레이자(Freisa)이라는 품종을 되살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레이자는 피에몬테 지방의 오래된 토착 품종으로 지디 바이라가 관심을 갖기 전까지 사실상 잊혀진 품종이었다. 프레이자는 최근 연구결과를 통해 네비올로와 유전학적으로 가장 유사한 품종으로 밝혀졌는데, 지디 바이라는 이 품종을 오랜 기간 연구하고 재배해 '지디 바이라 프레이자 키에 랑게(GD Vajra Freisa Langhe DOC Kye)'라는 고품질 와인으로 탄생시켰다.
와인의 이름인 '키에(kye)'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이탈리아어 '누구인가?(Chi e?)'를 활용해 작명했다. 잊혀가던 토착 품종 프레이자를 활용한 와인에 대한 농담이자 이 와인을 통해 품종의 복원에 대한 의지와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내고자 한 이름이다. 프레이자 100%로 만든 키에는 바롤로와 달리 어두운 가넷색을 띠며, 신선한 체리와 허브 향, 약간의 흙 내음을 느낄 수 있다. 입 안에선 잘 만든 네비올로 와인처럼 섬세한 부케와 실크같이 부드러운 타닌이 인상적인 와인이다. 연간 6000병가량 한정 생산돼 희소성도 갖추고 있다.
고령이 된 알도의 와이너리는 이제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부모의 유산을 이어받아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알도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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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전통은 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불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와이너리는 항상 새로운 꿈과 연구, 발견, 희생, 삶, 기쁨으로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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