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
지난달 자택서 사망…향년 98세
'행복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이 사망했다고 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98세의 나이로 지난달 16일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사망한 그는 평생을 소득 증가와 행복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데 집중한 경제학자이자 인구학자였다.
1926년생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30년 이상 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이스털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스털린의 역설' 이론을 발표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부유할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가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핵심 논리다.
이스털린은 1974년 '경제 성장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소득 증가가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경제학자와 정부 당국, 세계인들이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하면 국민의 행복도가 향상된다고 믿던 시기였다.
이스털린은 1946년부터 부유국과 빈곤국,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등 30여개 국가의 행복도를 연구했고 19개국의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부유국의 국민들이 빈곤국의 국민보다는 더 행복하다는 점은 확인했으나, 소득이 증가하는 것에 비례해 행복도가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분석했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소득이 극적으로 증가했으나 설문조사에 응한 미국인들의 행복도는 향상되지 않았다는 사례를 언급했다. 또 이후 일본에서도 소득이 1958~1987년 중 5배로 뛰었으나 '행복도가 증가했다'는 일본인의 응답은 그리 늘어나지 않았다고 이스털린은 발표하기도 했다. 핵심은 결국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주장이었다.
이스털린은 동시에 소득 증가가 개인의 행복 증대에 영향을 주려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본인의 소득이 더 많이 증가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본인의 소득이 늘어도 친구, 직장동료, 이웃이 모두 소득이 늘면 사회적으로 비교하는 행동 때문에 소득 증가를 즐기지 못하고 행복감을 덜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스털린의 발표는 행복경제학의 핵심 논리가 됐다.
하지만 반론도 이어졌다. 2008년 미국 경제학자인 벳시 스티븐슨과 저스틴 울퍼스가 개인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도 소득의 절대 규모가 클수록 행복도도 높다며 이스털린의 역설을 반박했다. 프린스턴대학의 심리학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네먼도 같은 해 NYT 기고문을 통해 "이스털린의 역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가 엄청나게 많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스털린은 자신의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면서도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재반박하곤 했다. 2016년 89세의 나이로 미국경제학회(AEA)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스털린은 미국이 1946년부터 약 70년간 개인 소득은 3배로 늘었지만, 행복은 정체되거나 낮아졌다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논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스털린은 한때 그 어떠한 공공 정책도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에는 큰 효과가 없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90대 중반이던 2021년 한 인터뷰에서 "소득 증가가 행복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도가 덜한 데 반해 건강이나 가족과의 생활이 개선되는 건 엄청난 영향을 준다"며 관련한 공공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이스털린은 2009년 독일에 본부를 둔 비영리연구기관 노동경제학연구소(IZA)의 IZA 노동경제학상을 수상했다. IZA는 "경제 성장과 행복, 인간의 웰빙에 대한 생각을 바꾼 선구적인 연구를 한 이스털린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그의 통찰력은 이 분야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고 밝혔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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