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 "황산 품질 저하…공정 흔들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가 영풍·MBK파트너스와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고려아연의 현 상황에 대해 이례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아연은 국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고순도 황산을 공급하는데, 최근 경영권 분쟁으로 황산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거나 품질이 악화될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황산 공급이 어려움을 겪으면 반도체 사업에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된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국내 비철금속 산업계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사태의 장기화로 인해 제품 품질이 저해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한 반도체 업체는 최근 고려아연 측에 황산 공급 및 품질 유지 요청서를 공식 발송했다. 이 업체는 요청서에서 "귀사(고려아연)의 황산 품질 미세변동으로도 당사 공정 산포(공정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 변동 크기)가 흔들리고 있을 정도"라며 경영권 분쟁 이후 생산된 황산 품질에 대한 우려를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이어 "오랜 기간 고려아연의 꾸준한 증설을 통한 안정적인 공급, 협업 및 품질투자로 동반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하며 "황산은 매우 중요한 소재이며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품질관리가 필요한 만큼 미래 수요를 대비한 양사 간 긴밀한 협의 매우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제품 및 공정 난이도가 증가함에 따라 황산 품질에서 특이점이 발생할 경우 반도체 생산 및 품질관리에 심각한 데미지(손실)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반도체 황산의 안정적인 공급과 품질 유지 및 개선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고순도 황산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웨이퍼 표면의 이물질이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된다. 반도체 제조 과정 초기와 후반 공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황산의 순도가 반도체 성능과 수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는 국내 고순도 황산의 약 65%를 공급하는 최대 생산 기지다. 반도체용을 포함해 연간 총 140만t(2023년 기준)의 황산을 생산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공급하고 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대규모 반도체 투자가 진행되고 있어 황산을 미래 사업으로 정하고 향후 수요 증가에 맞춰 생산 설비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영풍·MBK가 적대적 M&A(인수합병)를 시도한 이후 반도체 황산뿐만 아니라 여러 제품에 대한 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지난달엔 고려아연 주요 생산 제품인 아연, 연, 귀금속, 반도체 황산을 공급받는 국내 외 80여개 기업이 제품 품질 연속성이 저해될 가능성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품질 유지 요청서를 보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인듐, 코발트 등 희소금속과 비스무트, 안티모니 등 전략광물자원의 공급도 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또 고려아연 기술진과 노동조합이 MBK측의 경영권 확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어, 자칫 핵심 인력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크다. 고려아연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제중 부회장과 핵심 기술인력들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열고 MBK가 경영권을 가져가면 전원 퇴사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반발은 MBK·영풍의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영풍은 지난 5년간 연평균 영업이익이 약 7억원에 그치지만, 고려아연은 8700억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본업인 제련 부문에서도 작년까지 3년 연속 적자가 나고 있다. MBK도 ING생명·홈플러스·bhc치킨 인수 이후 구조조정과 조기 매각 논란을 빚었었다.
정치권에서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으로 인한 기술 유출, 해외매각을 우려하고 있다. 사모펀드의 특성상 투자 수익 확보를 위해 투자를 줄이거나 거래처와 계약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시각이다. MBK는 앞서 중국 자본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중국에 고려아연을 넘길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김광일 MBK 부회장은 지난 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뛰어든 MBK의 10조원 규모 6호 펀드 가운데 중국 자본 비율은 5%가량을 차지한다"며 "중국으로 기술이 유출되거나 중국에 기업을 매각할 계획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으로 제품 공급에 차질이 예상되면 고려아연 물량을 줄이고 다른 업체로 공급처를 바꿀 수밖에 없다"면서 "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핵심 고객사가 사라지면 회사 차원에서 큰 손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주주가치도 크게 낮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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