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해보다 길어진 여름
기상이변으로 장바구니 물가도 부담 커져
국회, 기후특위 구성 서둘러야
올해 여름은 그 어느 해 여름보다도 길었다. 추석까지 열대야에 시달리며 에어컨만 찾아다닐 줄 상상도 못 했다. 명절이 지난 뒤에는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다’는 말이 나온 것처럼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남부지방 곳곳에서 극한 호우를 겪어야 했다. 열대야, 셀 수 없이 도처에서 알려오는 집중호우를 겪으며 ‘기상 관측 사상’이라는 말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는 수사 이상의 의미가 없는 말이 됐다.
10월이 시작돼서야 비로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기온이 급락한 탓에 갑작스러운 가을이 당황스러웠다. 올해 더웠던 만큼 겨울이 추워질 수 있다는 예보도 예사롭지 않다. ‘라니냐 현상’ 등 영향으로 올해 겨울은 평년보다 잦은 폭설과 한파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가을의 운치는 찰나와 같이 흘러갈 듯하다.
기후 변화는 더위나 폭우, 추위, 폭설 등 일상생활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 전반의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가령 농작물 생태계의 변화는 장바구니 물가를 흔들고 있다. 천정부지로 오른 배추나 상추, 오이 등의 가격 상승 이면에는 기상 이변이 있다. 이른바 ‘기후플레이션’이 우리 밥상을 위협하고 있다. 아열대 작물에 해당하는 망고와 바나나가 충청도나 강원도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소식은 급격하게 진행되는 날씨의 변화가 이 땅의 생태계를 어떻게 뒤바꾸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기후 변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외신을 통해 들려오는 다른 나라 소식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최근 스위스와 이탈리아가 국경선을 다시 그리기로 했는데 이유는 알프스산맥의 마터호른산 일대의 빙하가 녹아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염과 가뭄, 홍수 소식이 경고등처럼 들어오고 있다. 무수히 많은 기후 관련 소식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대응은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달 국회는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상승하는 시점까지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기후위기시계를 국회의사당 앞으로 옮겼다. 의사당을 오가는 모든 이들이 4년 남짓 남은 시계를 멈추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비상한 각오로 절박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의사당 내부의 실제 결정권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런 각오가 엿보이지 않는다. 지난 국회에서는 기후위기특별위원회(기후특위)를 운영했지만, 입법권과 예산심사권 등 의회의 고유한 권한이 없는 탓에 형식적 보고만 받는 데 그쳤다. 이런 이유로 22대 국회 들어서 입법권·예산권이 부여된 기후특위를 설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특위 설치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국회의장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찬성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른바 '현안'에 밀려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를 두고서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대선후보가 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는 기후 위기가 우리가 당면한 중대 위험이라는 점에 대해선 정치권 내 이견이 없다.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도 같고, 해법에 대해서도 공감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원인은 하나다. 근무 태만이다.
나주석 정치부 차장 gonggam@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