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 개인전
박테리아·꽃·향 등 활용한 다학제적 작업
신작 11점 등 총 33점 공개…12월29일까지
개미와 흙 속 미생물, 곰팡이와 박테리아 등 살아있는 생물을 통해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명체를 통한 도발적 내러티브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미술관 전시가 관객을 찾아온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은 아니카 이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을 12월 29일까지 개최한다.
튀긴 꽃, 박테리아와 냄새와 같은 유기적이고 일시적 재료를 사용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이산과 여성주의 등 사회적 이슈를 담아낸 작업을 다양하게 선보여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지난 10여년간 제작된 작품 33점을 공개한다.
생물을 조력자 삼아 제작한 작품에서 삶과 죽음, 영속성과 부패 등의 실존적 주제를 다뤘던 그는 최근에는 기계와 균류, 해조류 등 비인간 지능을 탐구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전시명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불교 수행법 중 하나인 간화선(看話禪·화두를 사용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에서 사용되는 화두 특성을 차용했다. 명상적이고 영적 전환을 반영하는 이 구절은 작가가 초기부터 각종 비인간 생물과 기계, 그리고 협업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자성(著者性)과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해 온 작업이 결국 '나와 타자의 경계 없음'에 대한 탐구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 반영하듯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과학자와 건축가, 조향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한편, 생물학과 기술철학, 환경정의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구로 작품의 깊이와 너비를 드러낸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생물을 사용함으로 생명의 진화과정과 라이프 사이클을 선명히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과 생물들 모두 이 사이클의 일부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각각의 생명체가 서로 다른 시간의 척도를 갖고 있음을 알리는 동시에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의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선사 인류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가설과 조류 및 균류의 이동이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이 전시 이론의 기반을 구성한다. 이는 2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물질적, 시간적, 정서적 차원을 아우르는 두 갈래의 탐구를 통해 그는 한인 교포로서 개인적 여정을 반영하고, 나아가 이주와 상호 연결성이라는 작업의 주제를 부각한다.
영상 작품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는 작업의 전환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신작으로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작가의 대규모 프로젝트 '공'(空)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작가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기존 작업물을 데이터 삼아 훈련한 알고리즘이 작가 스튜디오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한다. 동시에 공동 연구와 협업을 바탕으로 이뤄진 아니카 이 스튜디오의 유기적인 작업 방식을 반영한다.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간의 관계를 탐구한 다른 신작 '또 다른 너'(2024)는 미국 컬럼비아대와 이화여대 미생물학 연구실과 협력한 작품이다. 끝없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인피니티 미러 형태의 작품 속에는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미생물이 자라면서 연하게 색을 발한다. 평범한 미생물이 합성생물학을 통해 해파리나 산호와 같은 해양생물의 유전질을 계승하는 과정은 고대의 바다와 현재의 우리 사이의 연결지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튀긴 꽃으로 만든 신작 '생물오손 조각'(2024) 연작은 2000년대 작업에서부터 등장한 튀긴 꽃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으로, 튀겨진 꽃의 기름진 외형과 시큼하면서도 부패한 냄새는 일반적으로 꽃이 상징하는 아름다움과 다른 이미지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방산충'(2023) 연작은 고생대 캄브리아기 화석에서 발견되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 해양성 플랑크톤 방산충류를 참조한다. 방산충의 형태를 닮은 모습과 마치 숨을 쉬듯 고동치는 조명,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렸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촉수는 유기체와 기계의 소통을 상상하는 작가의 '기계의 생물화' 개념을 투영한다.
장내 미생물군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공생적인 빵'(2014)은 미생물과 인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형태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부드럽게 빛나는 비누 조각에는 박테리아의 모습이 투사되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생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진아 큐레이터는 "지난 10년간 아니카 이의 주요 작업을 망라하고 작업의 큰 전환을 보여주는 신작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로, 현재까지의 작품 세계를 톺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와 공동기획으로, 내년 3월 베이징 UCCA에서도 진행될 예정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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