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위험 상품에만 29조 몰려
고위험 상품 가입 4800억 그쳐
지난해 7월 11일부터 시행된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제도가 1주년을 맞았다. 디폴트 옵션은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과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적립금 운용 방법을 지시하지 않으면 퇴직연금 사업자가 사전에 약속한 방식대로 자동 운용하는 제도다. 이는 퇴직연금 가입자의 무관심이나 금융 지식 부족으로 인해 초저위험 상품에 적립금이 몰려 수익률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다.
시행 1년 후, 현재 41개 퇴직연금 사업자의 총 305개 상품이 판매 운영 중이다.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공시에 따르면 적립금은 32조995억 원, 지정 가입자 수는 565만1000명에 달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가입자의 90% 가량이 원리금 보장 상품 100%인 초저위험 등급에 몰려 있어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폴트 옵션은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의 4단계로 분류되며,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실적 배당형 상품은 2단계 저위험부터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위험 부담을 조금이라도 감수하려는 가입자가 10명 중 1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적립금 규모는 지난해 4분기 12조5520억원에서 올해 상반기 기준 2.6배 이상 증가했다. 제도별로는 DC형과 IRP가 각각 23조4985억 원, 9조411억원의 적립금을 모았다. 위험 등급별로는 초저위험 등급 상품에 29조3478억 원이 몰렸고, 저위험과 중위험 상품은 각각 1조8772억원, 1조211억원, 고위험 상품은 4834억원에 그쳤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인 401k와 대조적이다. 미국에서는 연금자산의 42%가 주식형 펀드, 31%가 타깃 데이티드 펀드(TDF)에 투자되고 있으며,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8.4%에 달한다. 401k에서는 디폴트 옵션이 기본적으로 투자형 상품으로 선택되어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국내 업권별로도 편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 디폴트 옵션 적립금이 27조원을 넘는 반면, 증권업계는 1조원 수준에 그쳤다. 증권업계에서는 미래에셋증권이 3500억 원으로 적립금이 가장 많았고,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이 그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입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가입자 교육이 운용 지시에 대한 합리적 관심을 유발할 수 있다면 원리금 보장 상품의 허용이나 대표 상품화에 따른 선택 편의 등 수익률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개별 가입자가 아닌 운용 기관이 전체 가입자의 적립액을 묶어서 기금 형태로 운용하는 제도로, 안정성과 평균 수익률이 모두 높다는 장점이 있다.
더 나아가 디폴트 옵션에서 원리금 보장 상품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 영국, 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 대부분이 실적 배당형 상품만으로 디폴트 옵션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근로자 퇴직급여보장법 개정이 필요하며, 은행의 반발도 예상되어 실현까지는 난관이 예상된다.
현재 고용노동부와 기획재정부 등 정부 부처에서 디폴트 옵션의 수익률 개선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전문가들은 투자자들에게 노후를 위한 적극적인 공부와 함께, 정부와 당국의 인식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금융감독원에서 제공하는 퇴직연금 상품의 수익률, 적립금 등 주요 정보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제도가 도입 취지에 맞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보완과 함께 투자자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앞으로 미국 등 선진국 사례를 참고해 제도를 보완하고, 투자자들에게 더 나은 상품을 제공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김필수 경제금융매니징에디터 pilsoo@asiae.co.kr
이선애 증권자본시장부장 lsa@asiae.co.kr
이미리 PD eemilll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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