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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때]거대한 러시아 제국 '혈우병'에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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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병
둘째딸·손녀·증손자까지…
요승 라스푸틴에 치료 의지
황제 비호 아래 '국정 농단'
여론 악화…혁명으로 이어져

인류의 생물학적 요인들…
역사 바꾸는 결정타 되기도

니콜라이 2세(1868~1918)는 러시아 제국(1721~1917)의 마지막 황제다. 1894년 즉위해 러일전쟁(1904~1905)에서 패했고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2월 혁명으로 폐위됐다. 이듬해 혁명 세력에 의해 가족과 함께 총살됐다. 이로써 미하일 1세가 루스 차르국(1547~1721)의 차르로 취임한 1613년부터 러시아 제국 시기까지 30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한 로마노프 왕조 시대가 마감됐다. 니콜라이 2세는 무능한 군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제정 말기 니콜라이 2세가 민심을 잃은 이유는 정치·경제적 혼란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영국 웨스트민스터대학의 루이스 다트넬 과학 커뮤니케이션 교수는 저서 ‘인간이 되다(원제: Being Human)’에서 유전적 요인에 주목한다. 니콜라이 2세는 황후 알렉산드라와의 사이에서 딸만 넷을 낳은 뒤 1904년 아들 알렉세이를 얻었는데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았다.


혈우병은 피가 잘 응고되지 않아 출혈이 계속 되는 질환이다. 혈액 응고 인자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 응고 인자 유전자는 X염색체에 저장돼 있다. 이 때문에 X염색체가 두 개인 여성보다 X염색체가 하나 뿐인 남성에게 많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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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는 영국을 64년간 통치한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의 외손녀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보인자였다. 응고 인자 유전자가 부족한 X염색체와 정상인 X염색체가 하나씩이어서 혈우병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그 증상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안타깝게도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는 둘째 딸과 손녀 알렉산드라를 거쳐 증손자 알렉세이에게 유전됐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병약한 알렉세이가 혹시 피를 흘릴까 늘 노심초사했다. 백방으로 치료법을 알아보던 알렉산드라는 1907년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이라는 요승을 소개받는데 라스푸틴은 알렉세이를 진정시키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황제 부부는 라스푸틴에 의지했고 라스푸틴은 황제 부부의 비호 아래 국정을 농단했다. 내정에 간섭하고 총리, 장관의 중요 직책의 인사에도 개입했다. 황실에 대한 여론은 점점 나빠졌고 결국 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다트넬 교수는 ‘인간이 되다’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이 일으킨 역사와 문화의 변화를 흥미롭게 전한다. ‘인간이 되다’는 다트넬 교수가 쓴 인간 3부작의 마지막 책이다. 앞서 ‘사피엔스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과학 지식’과 ‘오리진’을 출간했다.


혈우병 보인자 빅토리아 여왕은 자녀 9명을 낳았고 유럽의 평화를 위해 후손들을 유럽의 여러 왕가와 정략결혼시켰다.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는 그래서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만큼 큰 영향을 받은 곳이 스페인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는 막내 딸 비트리어스에게도 유전됐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1886~1941)가 비트리어스의 딸과 결혼해 낳은 첫째 아들이 혈우병을 앓아 스페인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큰 혼란을 겪었다.


다트넬 교수는 DNA 뿐 아니라 감염병, 유행병, 인지 편향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인류의 생물학적 요인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핀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 개통됐다. 하지만 이보다 200년 이상 앞선 17세기 말에 스코틀랜드는 당시 파나마 지협의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지협 인근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 당시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 다리엔 계획이라 불렸다. 하지만 다리엔은 오늘날에도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로 꼽힌다. 1698년 이주민 1200명을 실은 배 다섯 척이 스코틀랜드에서 출항했다. 하지만 다리엔에 도착한 많은 이주민들이 말라리아와 황열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스코틀랜드는 네 차례에 걸쳐 2500명을 보냈지만 이 중 20%만 살아돌아왔다. 애초 스코틀랜드가 다리엔 계획을 추진한 이유는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잉글랜드의 억압적인 경제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다리엔 계획이 실패하면서 되려 재정적 어려움이 커졌고 결국 1707년 잉글랜드와 통합하는 결과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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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말라리아와 황열병 때문이었다. 당시 기나나무 껍질이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었는데 영국군에는 이 예방약이 부족했다. 기나나무 껍질의 유일한 공급원은 페루의 안데스 산맥이었는데 페루는 미국 편을 든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스페인은 영국을 기나나무 껍질 공급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를 도왔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이어진다. 8~11세기 바이킹 시대의 원인은 장자 상속제 때문이었다. 이 시기 북유럽에서는 작은아들의 수가 크게 늘었는데 이들이 땅을 가지기 위해서는 해외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다트넬 교수는 또 미국이 이라크전에 집착했던 이유와 영국과 프랑스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면서 초음속 항공기 ‘콩코드’ 개발에 매달렸던 이유가 애초 잘못된 인지 편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다트넬 교수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류가 구축해온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룩해온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르를 잘 이해하면 앞으로 닥쳐올 난관이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트넬 교수는 맺음말에서 건강에 좋지 않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가공식품을 먹는 이유도 인지 편향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보상을 과잉 평가하는 반면 장기적인 결과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당장 인류에게 닥친 큰 위기는 기후변화이며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장기적 시각에서의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인간이 되다 | 루이스 다트넬 지음 |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440쪽 | 2만6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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