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횡령 사고 책임 공방
강력한 내부통제 시스템 절실
실패 땐 철저하게 책임 물어야
지난해 4월 우리은행에서 700억원대 횡령 사건이 발생한 데 이어 5월 모아저축은행 59억원, 6월 KB저축은행 95억원, 9월 경남은행 3000억원대의 횡령·유용 사고가 잇따랐다. 특히 경남은행의 투자금융기획부장 이모씨(50)는 7년간 돈을 빼돌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에 따라 금융회사 횡령 사고의 책임론을 두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금감원은 횡령 사고의 원인을 경남은행의 지주사인 BNK금융지주의 내부통제 미작동 탓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에 따르면 자회사에 대한 내부통제 및 위험관리 업무를 지주회사의 업무로 명시하고 있다. BNK금융지주는 2014년 10월 경남은행의 지주 편입 이후 고위험 업무인 PF 대출 취급·관리 점검을 실시하지 않았다.
경남은행의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의 책임론도 거세다. 이씨가 PF 대출 상환 자금 횡령을 시작한 2016년엔 안진회계법인, 범행이 이어진 2017년엔 삼일회계법인이 외부감사 업무를 맡았다. PF 대출금·상환 자금을 빼돌린 2021~2022년 외부감사인은 안진회계법인이었다.
최근 기자가 만난 회계법인의 고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책임론을 내세운다면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다만 회계법인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다소 억울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근본적인 문제는 회사의 통제 감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다. 경남은행이 회계 관리 시스템을 제대로 운영하지 않은 게 1차적인 책임이며, 안진과 삼일이 회계 감사에 소홀했다면 2차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는 의미다.
이씨의 횡령은 부실 PF 대출 상각채권에서 회수될 금액을 개인계좌로 빼돌리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럴 경우 채권이 애초에 손실처리돼 장부에도 남지 않아 회계감사를 하더라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감사 소홀에서는 어느 정도 책임론을 피할 수 있는 부분이다. 회계 업계는 전수조사가 아니라 샘플링(표본조사)을 적용해 업무 담당자가 고의로 내부 서류를 조작하면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당국도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금감원이 정기·수시 검사를 하면서도 횡령을 초기에 적발하지 못해서다. 사실상 최근 적발한 사건들은 제보 또는 개별 금융사 자체 점검을 통해 범행을 최초 인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횡령 범죄는 자금을 추적해야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알아채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당국의 항변이다.
서로 네탓 공방만 벌일 때가 아니다. 당국과 감사인이 횡령 적발에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횡령을 근본적으로 근절하려면 강력한 내부통제 시스템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내부통제에 실패한 금융사 CEO와 임원에 철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회계분식 사건의 책임을 CEO에게 묻는 '사베인-옥슬리' 법안 채택 이후 기업 내 부조리가 크게 줄었다. CEO의 내부통제 책임이 법적으로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은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관리의무와 사전감시 역할을 강화하는 내용이 핵심인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지난달 11일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내부통제 총괄 책임자'의 권한과 책임을 모두 명시한 '책무구조도' 도입이다. 책무구조도란 금융회사 임원의 직책별 책무를 사전에 정해 문서화한 것이다. 영국·싱가포르 등에선 이 제도를 이미 활용하고 있다.
천문학적 규모의 횡령·배임 사고가 은행·카드사 등에서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고 있다. '금융권 횡령의 시대'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이선애 증권자본시장부 차장 ls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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