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에 가면 개심사(開心寺)라는 절이 있다. 사찰의 이름 그대로 그곳에 가면 마음이 열리고 편안해진다. 대체 왜 그럴까 둘러보니, 절집을 지은 기둥이며 보가 모두 구불구불하다. 반듯하게 서 있는 다른 절들의 기둥과는 달리 온통 뒤틀리고 구부러져 있다.
안토니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神)의 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구엘 공원, 성가족성당, 까사 밀라 등 세계적인 건축물을 설계하며 곡선을 활용했다. 개심사의 주지와 목수는 가우디와 같은 미적 감각을 지닌 인물들이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추측은 다르다. 우리나라의 나무는 대체로 휘어져 자란다. 캐나다 로키에서 볼 수 있는 침엽수림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있지 않다. 하여 늘씬하게 뻗은 기둥이나 보를 얻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큰 나무를 베어 다듬어야 한다. 큰 나무를 얻으려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게 당연한 이치다. 곧게 뻗은 기둥을 얻고자 하면 심산유곡으로 찾아가야 하고 당연히 그곳으로부터 그 무거운 나무를 실어 날라야 하니, 사람의 힘으로는 부치고 응당 수레에 실어야 한다.
그런데 평지의 길과는 달리 산중에서 소나 말이 끄는 수레로 나무를 나르려면 산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터야 가능하다. 한마디로 곧은 기둥과 보를 이용하려면, 목수의 수고로움이 몇 갑절 더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이유도 없이 작은 나무의 생명이 스러져갈 수밖에 없다.
개심사의 주지(住持)가 이 점에 주목한 것은 아닐까. 일주문부터 시작해 범종각,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절집의 모든 기둥과 보는 올곧아야 한다는 '소유'의 관점에서 벗어나 철저히 '무소유'를 실천한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추측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기둥과 보가 곧아야 신도들의 경외감을 일으키고 사찰의 권위가 설 것이라는 소유의 관점을 과감히 버린 셈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법정은 개심사를 방문한 적이 있을까. 만약 개심사를 둘러봤다면, 분명 건축물에 깃든 무소유 정신에 감복했을 것이다.
-김훈종, <논어로 여는 아침>, 한빛비즈, 1만68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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