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재고 비상]킹달러에 재고 폭탄까지…스태그플레이션 본격화

기업 재고, 26년 만에 최대폭 증가
경영 시계 한 치 앞도 안보여
제품생산 폭증했지만 수요 못받춰
기업 비용 부담 덜어줄 지원 시급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 정동훈 기자, 최서윤 기자] 기업 재고가 외환위기 이후 26년 만에 가장 많이 늘어났다. 대외변수에 따른 일시적 조정이 아닌 수요가 줄어드는 본격적인 경기침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관련기사] '기업 재고 비상'

원자재발(發) 물가 상승이 해소되지 않은 사이에 수요 감소까지 겹치면서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동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16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내놓은 ‘기업활동으로 본 최근 경기상황 평가’ 자료를 보면 2분기 산업활동동향의 제조업 재고지수 증가율이 18.0%를 기록,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2분기(22.0%) 이후 26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폭을 기록했다.

기업의 재고는 경기 변동에 따라 늘거나 줄어드는데 최근 재고 증가 흐름은 작년 2분기를 저점으로 4개 분기 연속 상승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분기 기준으로 이처럼 장기간 재고지수가 상승세를 보인 것은 2017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이다.

특히 대기업이 상대적으로 많은 재고를 떠안고 있다. 기업 규모별로 대기업의 재고지수 증감률은 지난해 2분기 -6.4%에서 올해 2분기에는 22.0%로 치솟았으나, 중소기업은 1.2%에서 7.0%로 상대적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제조업 상장기업 약 1400여개를 대상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 재고자산은 작년 2분기 61조4770억원에서 올해 2분기 89조1030억원으로 증가했지만, 중소기업 재고자산은 7조4370억원에서 9조5010억원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최근 원화가치 하락에도 수출이 늘지 않을뿐더러 물가 상승으로 소비도 늘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는 시각도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비용 증가"라며 "기업의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해 세금을 줄여주거나 규제 개선 등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킹달러에도 힘못쓰는 수출…경기 침체 본격화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진입을 앞둔 '킹달러' 시대지만 해외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시장에 호재라는 말은 옛말이 됐다.

핵심 수출품인 반도체가 26개월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고 그나마 자동차와 석유제품이 친환경 트렌드와 고유가에 힘입어 수출 실적을 견인하고 있지만, 하반기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소비가 줄어들면서 제품이 팔리지 않으니 기업 창고에는 재고가 쌓이고 있다. 경기 하방 압력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은 경영 시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16일 대한상공회의소가 한국평가데이터에 의뢰해 매분기 재무제표를 공시하는 제조업체 상장기업(약 1400여개)을 대상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상반기 말 기준 제조업 전체 재고자산은 140조9860억원으로 전년 동기 100조8970억원 대비 39.7%나 늘었다.

업종별로는 비금속 광물제품(79.7%), 코크스·연탄 및 석유정제품(64.2%),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58.1%), 1차 금속(56.7%) 등의 재고자산 증가율이 특히 높게 나타났다.

특히 재고자산 물량이 가장 많은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의 경우 전체 제조업 재고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년 2분기 24.7%에서 올해 2분기 27.9%로 비중이 확대됐다.

상의는 "작년 하반기부터 코로나19 특수 대응 차원에서 공급을 늘렸고, 국제유가·원자재가격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이 원자재를 초과 확보해 제품 생산에 투입한데다, 글로벌 공급망 차질로 인해 제품 출하가 늦어졌다"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단기 이슈인 만큼 글로벌 수요만 받쳐준다면 곧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업들이 기대해 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글로벌 인플레이션, 미국의 지속적인 금리 인상 등으로 글로벌 수요 기반이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재고 부담에 기업들 채용·투자 감소 우려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는 "지난 2년간 반도체 등 일부 제품들의 생산이 폭증했으나 예상과 달리 글로벌 수요가 받쳐주지 않아 재고자산에 돈이 묶이는 형국"이라며 "러-우 전쟁이나 중국의 엄격한 '제로 코로나' 정책 등 일련의 돌발 변수들이 발생하면서 기업들의 수요 예측이 빗나간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고가 쌓이면서 자금이 돌지 않아 투자나 고용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재고가 쌓인다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이제 돈이 회전이 안 된다는 것"이라며 "기업들이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고 생산을 줄이면 그만큼 인력도 덜 필요해 결국 고용 시장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정부가 무역수지 개선, 중장기 수출경쟁력 강화 지원 등 수출 종합 전략을 발표한 만큼 이를 조속히 실행에 옮겨야 한다"며 "기업 채산성 악화가 생산 감소, 고용·투자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규제·노동·금융·교육 등 구조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의 고비용 구조를 개선해 나가는 것도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덧붙였다.

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