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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강주희의 영상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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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강주희의 영상프리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 이미지./사진=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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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당신은 그 장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으신지요. 이는 영화가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영상 속 한 장면을 꺼내 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전해드립니다. 장면·묘사 과정에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모멸감. 업신여겨지고 무시당할 때 느끼는 수치스러움. 모멸감은 존재 가치를 부정당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을 말한다.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는 직접적인 폭언을 듣거나 조롱을 당할 때 느끼는 분노인 '모욕감'과 '모멸감'은 다르다고 설명한다. 모욕은 그 행위가 의도적이고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즉시 인지할 수 있지만, 은연중에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인 모멸은 쉽게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상적인 발화에 교묘히 숨겨져 있는 모멸은 그래서 이를 느낀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게 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그리고 모멸은 가장 정당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의 제도와 기준, 원칙이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정당화되기도 한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런 모멸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빈번하게 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목수인 다니엘이 지병인 심장병으로 일을 못 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입이 끊긴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다니엘의 주치의는 그가 아직은 일을 해선 안 된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정부 기관은 그의 건강이 구직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받을 수도, 그렇다고 다시 일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영화는 다니엘이 질병수당을 타기 위해 심사를 받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심사관은 사무적인 어조로 필요한 질문을 이어간다. "혼자서 50m 이상 걸을 수 있나요?" "서류를 받았는데 뭐라고 쓰신 건지 알아보기 어렵네요" "질문에만 대답해 주세요" 암전된 상태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니엘의 가슴에 콕콕 박힌다.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다니엘이 겪는 고초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이어진다. 다니엘은 질병수당 거절에 대한 항고를 준비하면서 구직수당을 신청하는데, 관공서는 모든 서류를 인터넷으로 제출하라고 한다. 고령의 다니엘이 컴퓨터 사용법을 알 리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으로 컴퓨터 화면 속 신청서 항목을 조금씩 채워나가지만 수십 번 실패한다. 그 어디에도 노인을 배려하는 제도 같은 것은 없다.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이력서 강좌에선 목수인 다니엘이 전혀 활용할 수도, 일하는데 실질적으로 쓸모도 없는 정보만 알려준다. 강사는 말한다. "눈에 띄십시오" "영리해져야 합니다." 강사의 말과 정부 기관 사람들이 다니엘을 향해 내뱉는 메시지는 '당신이 일자리를 잃게 된 이유는 당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남들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 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니엘은 열변하는 강사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떨군다.


영화는 모멸감이 일상 속 곳곳에서 행해질 수 있음을 고발한다. 가난과 실직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무정한지. 사회적 약자에게 제도와 기준, 원칙이라는 이름의 모멸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강주희의 영상프리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 이미지./사진=영화사 진진


지난달 26일 서울대에서 일하던 한 청소노동자가 기숙사 휴게실에서 쉬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 청소노동자에게 지병은 없었다. 그는 생전 과중한 업무와 부당한 지시로 고통을 호소해왔다.


서울대는 청소노동자들에게 필기시험을 보게 했다. 근무하는 기숙사명을 영어·한자로 쓰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필기시험 성적을 '인사평가에 적극적으로 반영할 계획'이라고 서울대는 고지했다. 낮은 점수의 시험지를 동료들에게 공개해 창피와 수치심,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회의 때 '최대한 멋진 모습'으로 참석하라며 '드레스 코드'를 지시했다.


서울대는 필기시험을 치른 이유에 대해 유학생에게 적절한 응대를 하기 위해서, 복장 규정을 한 것은 회의 참석 후 곧바로 퇴근할 수 있도록 평상복을 입으라는 지침이었다고 해명했다. 서울대 구모 교수는 이번 사고에 대해 "한 분의 안타까운 죽음을 놓고 산 사람들이 너도 나도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것이 역겹다"는 글을 올렸다. 자신들의 지시에 잘못된 점은 없었으며 정당한 요구였다는 주장이다.


모멸은 이렇게 정당화된다. 교육의 일환, 업무 지침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앞세워 남모르게 수치심을 주고 이의 제기를 해도 교묘히 비난을 피해 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서울대는 청소노동자 사망 직후 학교를 비판하는 보도가 쏟아지자 학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정말 '피해자 코스프레'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영화의 끝, 정부 보조금을 타는 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겪은 다니엘은 결국 구직수당 지급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 달라고 한다. 수당을 받지 못하면 곧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가 되지만 그의 표정은 단호하다. 그는 말한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는 결국 질병수당 항고를 앞두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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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직접적인 욕설이나 물리적 행동만이 폭력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니엘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 이유는 돈이 없어서, 일자리를 잃어서, 병에 걸려서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모멸당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했을 때,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했을 때 그는 스스로 존립할 힘을 잃는다. 서울대는 고인의 사망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여전히 청소노동자들에게 가했던 모멸의 행위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았다.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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