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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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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에 성폭행 당하고 조현병 진단…성인되어 가해자 살해
법정서 "사람 아닌 짐승 죽였다" 진술…법원 '심신미약' 인정
여성들 일상 속 불안감 호소…성폭력 트라우마 극심
전문가, 성폭력 피해자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있어야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법정에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김부남. 사진=MBC '뉴스데스크'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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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말하면 너도 죽고 네 부모와 오빠도 다 죽는다"


1970년대 한 9살 소녀가 무참히 성폭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웃집 아저씨인 가해자 송백권(당시 35)은 이렇게 말한 뒤 사라졌다.


남겨진 소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극심한 고통에도 가족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워 경찰 신고는 물론 어디에도 자신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성폭력 피해자 김부남은 홀로 남겨졌다.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트라우마)는 곧 증상으로 나타났다. 혼자 멍하니 있는가 하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지나치게 화장실을 자주 찾았다.


김부남은 당연히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고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늘 불안하고 우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사춘기를 넘어 성인이 된 김부남은 중매를 통해 결혼한다.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의 손길이 '9살 소녀 김부남'을 성폭행했던 송백권의 손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부관계는 회복될 수 없었다.


결국, 김부남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남편에게 털어놨다. 하지만 오히려 남편은 처가로 전화해 김부남의 과거 성폭력 사실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김부남의 가족은 그제야 딸이 어릴 때 중년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김부남과 한 정신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하늘 보고 멍하니 중얼중얼…성폭력 피해자 김부남 결국 조현병 진단

정신과 의사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중얼거리며 사람을 회피하는 등의 증상을 근거로 김부남에게 '조현병' 진단을 내린다.


김부남 가족은 경찰을 찾아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당시 법은 성폭행 처벌의 경우 '피해자가 고소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인데 이미 고소 기한인 6개월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답을 듣고 심한 절망감에 빠진다.


이후 김부남은 극심한 분노와 절망감 사이에서 혼란스런 시기를 보내다 결국 '조현병'이 이어지면서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그러다 두 번째 결혼을 통해 만난 남편과 부부 관계를 갖게 되었지만, 오히려 '9살 소녀 김부남'의 일그러진 모습이 떠올라 소리를 지르고 남편을 밀쳐대는 발작 증세가 더 심해졌다.


결국, 김부남은 고향 동네를 찾아 자신을 성폭행한 송백권을 찾아 폭언과 협박을 하며 화를 풀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상 생지옥을 살아가던 김부남은 송백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지 20년이 지난 1991년 1월30일 그의 집을 찾아갔다.


김부남은 문을 박차고 송백권의 방 안으로 들어가 흉기를 꺼내 들어 송백권의 신체 주요 부위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다 다시 하복부 쪽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송백권의 비명을 닫고 달려온 이웃 주민들이 김부남을 붙잡고 흉기를 뺏으려 하자 김부남은 온 힘을 다해 흉기를 뺏기지 않으려 애썼다.


'9살 소녀 김부남'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던 성폭력 트라우마로 평생을 살아간 김부남은 그렇게 잔혹한 살인자가 되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살인 혐의로 김부남을 현행법으로 체포했다.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살인자 김부남 법원서 '심신미약' 인정…치료감호소에서 치료 받고 석방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부남은 법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라고 진술했다.


김부남의 이런 진술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피해자의 가해자 살해 행위의 처벌 여부와 정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1991년 8월26일 1심 법원은 피고인 김부남에 대해 "원래 가지고 있던 내성적이고 조현병인 성격이 아홉 살 때의 성폭행 경험으로 인하여 더욱 정신분열성인 성격으로 발달되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이러한 치명적인 경험이 적절히 치유되지 못하여 결혼 후에도 정상적인 성생활이 어려워지고 더욱이 이혼으로 충격을 받게 되면서 증상이 악화되었다. 아홉 살 때의 강간 경험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발전하고 이상한 행동, 부적절한 정서, 흥미의 결여, 심한 사회적 고립과 위축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잔재형 조현병 환자로, 이 사건 범행 당시에도 이와 같은 증상이 갑자기 발현되면서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한 행동의 장애를 보였던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법정에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김부남. 사진=MBC '뉴스데스크' 캡처


다만 "범행 당시에 1차 흉기를 뺏기자 과도로 재차 피해자를 가해하는 등의 범행 방법과 수단, 그 범행 동기와 경위, 시간과 방법 등을 논리 정연하게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할 때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어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심신 상실'의 상태가 아니라 감형의 대상인 '심신 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김부남에 대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집행을 3년간 유예하면서 1년간의 치료 감호 명령을 내렸다. 항소심과 대법원 최종심에서도 항소와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김부남은 이후 약 1년 7개월간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치료감호를 받은 뒤 1993년 5월 석방됐다.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2019년 제2의 김부남 있을 수 있어…여성들 일상 속 '불안감' 호소

1970년대 9살 소녀가 성폭행을 당하고 피해 사실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던 배경에는 당시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과 무관하지 않고, 이는 2019년 현재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양성평등의 시각을 기준으로 일상생활에서 성별 차이로 인한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하는 감성을 말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3월 발표한 '여성인권상담소 상담 통계분석'에 따르면 가정폭력, 성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 기타 등의 상담 유형 중 '성폭력'에 관한 상담이 685건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성폭력' 유형은 성추행, 강간 등 상대의 동의 없는 성적 언행으로 유발된 피해와 성매매까지 포괄한다고 '여성의전화'는 설명했다. 특히 수사·재판기관으로부터의 2차피해가 상당 수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차 피해 발생 중 가족·주변인에서 발생하는 비율은 55.3%로 "가족 불화 일으키지 말라", "네 남편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니 참고 살아라"라는 식의 폭력을 은폐하는 취지의 발언이나 "(가해자를)괴물로 만든 것은 네 탓이다", "네가 여우 짓을 해서 아들(남편)이 화내지 않게 잘하라" 등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사례가 많았다.


1970년대 '9살 소녀 김복남'이 느낀 절망감을 2019년 또 다른 누군가 느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28일 오후 한 트위터 이용자가 공개한 이른바 '신림동 강간미수범' 영상.사진=트위터 캡처


이런 가운데 서울에 사는 여성 2명 가운데 1명이 우리 사회가 “불안하다”고 인식했으며 , 여성 10명 가운데 7명 가량은 '범죄 발생' 때문에 불안하다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가 2016년 통계청 '사회조사'를 분석해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서울에 사는 여성 50.3%가 우리 사회에 대해 "불안하다"고 인식했다. 특히 20대(63%), 30대(59.2%) 여성층에서 불안감을 호소하는 답변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남성은 해당 물음에 37.9%가 "불안하다"고 답했다.


또 서울지방경찰청의 강력범죄(살인·강도·방화·성폭력 등) 2017년 피해 현황을 성별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 피해자는 90%에 달했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의 93.5%는 여성으로 나타났다. 최근 3년(2015~2017년) 동안 성폭력 범죄는 증가세(27.8% 증가)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사람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 잔혹한 성폭력 트라우마 [한승곤의 사건수첩⑨]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3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2018년 상담 통계'에 따르면 의료 지원을 받는 성폭력 피해자들 중 49%(39명)가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지 3년이 넘었다고 답했다.


특히 10년 이상 전에 피해를 경험한 대상자가 27.8%(22명)로 나타나 여전히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에서 3년이 27.8%(22명), 1년 미만이 22.8%(18명)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성폭력 피해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의료지원이 필요한 경우가 높은 걸 보면, 성폭력 피해가 남기는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 사회적 고민이 더욱 필요함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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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자가 겪는 심리 문제가 단기간 회복하기 어려운 실정이다"며 "이런 트라우마의 예방을 위해서는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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