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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훈의 돛단Book]사랑, 중세엔 최고의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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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중세르네상스연구소 엮음 '사랑, 중세에서 종교개혁기까지'

11세기말~17세기 유럽인 사랑의 모습
아내를 사랑한 기사에게도 관대했던 영주
자신의 영지 지키려는 고도의 통치전략

남성 중심 궁정식 사랑 유럽 전역에 유행
오늘날 젠더 갈등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박충훈의 돛단Book]사랑, 중세엔 최고의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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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개념은 개인적 감정과 더불어 사회적, 역사적 요소까지 포함한다. 그중에서도 많은 것들이 서양의 근대에서 유래했다. 기사도 정신이나 흰 웨딩드레스 같은 유무형의 문물이 오늘날 한국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때문에 서양의 근대를 낳은 전사(前史), 중세의 사랑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간 '사랑, 중세에서 종교개혁기까지'는 11세기말~17세기의 중세 유럽인들이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했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사랑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작용을 했고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만들었는지, 사랑이 어떤 방식과 맥락에서 성(性)과 섹슈얼리티로 번역됐으며 사회적 제도로 기능하게 됐는지를 살핀다. 서울대학교중세르네상스연구소에 속한 교수 열두 명이 공저자로 참여했다. '중세 덕후 선생님'들이 비전공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썼다.

◆아내를 사랑한 기사에 관대한 영주

서양의 근대적 사랑은 1800년을 전후한 낭만주의 시대에 유래한다. 사랑이 새롭게 정의됐고 그중에서도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 비중이 커졌다. 사랑해야 결혼할 수 있다는 개념도 생겨났다. 이렇게 생겨난 '낭만적 사랑'은 곧 근대성을 정의하는 요소가 됐다. 그런데 이 낭만적 사랑, 근대적 사랑의 특징은 그보다 훨씬 앞선 12세기에도 볼 수 있다.

12세기 초 남프랑스에서는 직접 가사를 붙여서 사랑 노래를 부르는 최상층 귀족남성들이 등장한다. 이 음유시인이 바로 '트루바두르'다. 이들은 프랑스 최초의 서정시를 지었으며 이상적인 사랑을 '핀 아모르(순정한 사랑)'라고 부르며 추앙했다.

트루바두르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조이(joi)라는 단어는 '여성의 사랑을 얻지 못해 애가 타는 상태'를 가리킨다. 조이는 '욕망충족에 대한 기대간과 불안감이 뒤섞인, 남성의 고통스러운 흥분 상태'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롭지만, 그렇다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는,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상태를 즐기는 감성'이다. 일종의 게임처럼, 멀리 있는 대상을 그리며 이를 얻고자 몰입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이다. 훗날 영국의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인 C.S.루이스는 이를 두고 "프랑스인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발명했다"고 했다. 물론 이는 철저히 남성의 입장일 뿐 작품 속에서 여성은 그저 남성의 마음에 불을 댕기는 문학적 오브제에 불과했다.

트루바두르의 노래는 남쪽의 영국과 북프랑스로 전파되며 마침내 왕들이 사는 궁정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2~13세기 전 유럽을 휩쓸었던 초특급 베스트셀러 '트리스탕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마크 왕의 부인 이죄와 사랑에 빠진 기사 트리스탕의 이야기는 '궁정식 사랑'이라는 문학의 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높은 신분의 여성과 기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왜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을까. 그 인기의 대전제 중 하나는 중세 시대의 결혼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결혼 풍습은 사춘기의 신부가 장성한 사내에게 그저 떠맡겨지는 형태였다. 부부간 사랑이 존재하기 극히 힘들었다는 의미다. 때문에 간통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대전제의 나머지 하나는 이러한 문학을 정치적으로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영지가 쪼개져 가문의 힘이 약해지는 걸 막기 위해 장남만 결혼을 하고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 나머지 형제는 떠돌이 기사가 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했다. 이들 버려진 강제 솔로남들이 귀족여인에게 갖는 욕망은 미뤄 짐작할 만하다. 혈기 넘치는 기사를 다루고자 영주들이 일종의 전략적 차원에서 궁정식 사랑 문학을 만들어냈다. 영주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기사를 다루는 궁정식 사랑 이야기를 슬쩍 눈감아줬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이용하려 한다. 기사와 왕비의 일회적인 사랑을 허락하는 일 외에는 다른 희생 없이 도전 세력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다는 이점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를 내세워 기사들의 충성 경쟁을 조장하는 동시에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은 절도"라는 식의 윤리를 슬쩍 끼워 넣어 그들의 충동을 제어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박충훈의 돛단Book]사랑, 중세엔 최고의 정치였다 프랑스 화가 가스통 뷔시에르가 1911년에 그린 '이죄'. '궁정식 사랑'을 다룬 작품 '트리스탕 이야기'는 기사 트리스탕이 아일랜드의 공주 이죄를 숙부 마크왕의 신부로 데려가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세시대의 영주들은 자신의 부인과 기사의 사랑 이야기를 눈감아주는 척 했지만, 이는 기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통치 전략이었다.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사랑

궁정식 사랑은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과 영국 등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며 수없이 변용된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이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 시각의 문학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저 유명한 작품 신곡의 저자인 이탈리아 시인 단테에게서도 그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테는 궁정식 사랑의 영향을 받은 시작(詩作) 기법 '달콤한 새로운 문체(돌체 스틸 노보)'로 명성을 누리는 시인들 중 하나였다. 베아트리체를 신(神)급으로 추앙하며 완벽한 이상형으로 떠받드는 작품의 근원은 궁정식 사랑이었다. 한편으로 단테는 신곡을 쓸 때 사용한 언어, 즉 속어(지방 사투리)를 가리켜 "여자들도 읽을 수 있는 언어"라고 설명한다. "여성도"라는 말 속에는 여성을 폄하하는 듯한 뉘앙스가 서려 있다. 또한 단테는 인류최초로 말을 한 것은 남자였다고 강조하며, 인류의 그토록 고귀한 행위가 남자가 아닌 여자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생각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중세의 상황과 오늘날의 젠더 간 갈등을 머릿속에서 비교해가며 읽으면 한층 흥미롭다. 14세기 장 드 묑이 쓴 장미이야기를 둘러싼 크리스틴 드 피장과 남성 인문주의자들 간의 설전을 다룬 부분에서도 현재의 남녀대결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장미 이야기는 궁정식 사랑과 대조적으로 여성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거나 노골적인 말장난을 사용해 남성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요즘말로 하면 '프로 불편러'라 할 여성 크리스틴 드 피장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며 작품의 면면을 비판했다. 이들의 설전은 왕이 주최한 문학 파티 '사랑의 궁정'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남성 참가자들이 크리스틴 드 피장의 편을 들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14세기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가 갖춰지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해 좌절과 분노를 겪은 남성 귀족들의 불안한 심리는 사랑의 궁정에서 위안을 찾는다.

한편 궁정식 사랑에서 좇던 절대자는 훗날 종교적 의미를 더해 여성에서 신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했다. 이후 근대에 이르러선 사랑도 개혁을 시작했다. 17세기 문인 존 밀턴이 '낙원 발견'에서 말했던 육체적 사랑의 긍정,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 가족에 의한 낙원 찾기 등의 결혼관이 확립됐다. 이 책의 공저자이자 서문을 쓴 이종숙 서울대 교수는 1920년대에 이르러 서구에 기원하는 근대적 연애론이 일본을 경유해 조선 문화 속으로 침투했다고 말한다. 서양 중세에서 비롯한 애정관이 마침내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충훈의 돛단Book]사랑, 중세엔 최고의 정치였다

서울대학교중세르네상스연구소 엮음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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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원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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