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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7] 진실의 앞에서, 모방의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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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7] 진실의 앞에서, 모방의 뒤에서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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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미술관을 다녀보면 흥미로운 광경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색적인 두 장면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추악한 진실을 예술의 이름으로 전시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술관이 시민을 위한 문화 실습공간을 제공하는 겁니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명작 앞에서 이젤과 캔버스를 펼쳐놓고 모사품을 그리는 것이지요. 상시적으로 제공되는 이런 기회의 주인공은 주로 깊숙한 중년 여인들입니다.


시립 현대미술관 옆의 특별한 미술관. ‘도쿄 궁전(Palais de Tokyo)’에서의 일입니다. 넓은 공간을 휘젓고 다니다가 저는 지하에서 끔찍한 전시를 봅니다. 이라크전쟁(2003~2011) 때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군 포로들을 고문하고 학대하는 사진전입니다. 인권유린의 참혹한 현장을 여과 없이 전하는 ‘진실의 힘’ 앞에서 숙연해집니다. 이 진실은 조작된 이미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 즉 ‘팩트(fact)’입니다.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쓴 나체의 이라크 병사들은 공포에 떨고 있고, 그 앞에 선 남녀 미군 병사들은 시시덕거리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포로가 나체로 뒤엉켜 마치 돼지고기를 냉동시켜 붙여 놓은 것 같은 살덩어리 느낌의 작품도 있습니다. ‘너희는 곧 도륙당할 고깃덩이들이야.’ 작품에선 이런 메시지가 들립니다.


인터넷에 퍼져 알려진 정보들이지만, 작가는 관람객들의 동선에 맞춰 새롭게 편집한 ‘진실’을 보여줍니다. 미로를 헤매 다니면서 인간의 광기와 공포를 섬뜩 섬뜩 마주치게 하는 것이지요. 미술관 측은 선진제국의 추악한 진실을 예술의 이름으로 공개하는 걸 지지합니다. 무수한 명화들 사이에서 이 사진 전시는 강렬한 목소리를 가집니다. 인간의 폭력과 광기는 회피함으로써 해소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방지할 수 있다고 웅변합니다.


악마는 은밀하게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이지요. ‘당신만 좋게 해 줄 테니 혼자만 알아야 해. 우리 사이를 폭로하면 너도 동업자니까 파멸할 거야.’ 인간을 각개 격파하는 악마의 전형적인 이야기 문법인데, 『불경』이나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기본형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서』 창세기의 사탄에 이르게 되지요. 사탄은 하와를 꼬여 선악과를 먹게 한 잘못으로 뱀으로 변하는 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뱀은 사탄이 아닙니다. 사탄은 지금도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지요. 그건 우리들 바깥의 실체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우리들 마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녹아버리는 포로들>(바그다드, 2013)의 작가는 용기 있게 말하지 않나요? ‘추악함은 아름다움의 반면교사. 고백할수록, 드러낼수록, 우리들 내면의 악마는 설 자리가 없도다!’ 진실 앞에 선 순간의 깜짝 깨침입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37] 진실의 앞에서, 모방의 뒤에서

1층 전시장으로 올라오니 명화들이 밝은 조명 아래 빛납니다. 그 앞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 그리는 여인을 봅니다. 명작을 베끼는 미술 기초반 학생 같습니다. 미술관에서 그림 그리기. 미술관이 전시 공간이 아니라 창작 공간으로 바뀌는 이색적인 모습입니다. 여인은 명작 감상의 차원을 넘어 스스로 화가가 되는 체험을 하는 중입니다. 화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창작의 순간을 상상하며, 화가의 감정을 자기 속으로 옮겨와 보기도 할 테지요. 미술관이 공공 아틀리에가 되는 좋은 문화 풍토입니다.


화가는 풍경을 재현합니다. 표현한다는 뜻이지요. 표현은 대상을 캔버스 위에 옮겨 놓는다는 점에서 진짜가 아닙니다. 화가의 표현이란 자연의 모방일 뿐이지요. 그런데 자연은 감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변치 않는 관념 즉 이데아를 모방하여 생겨났다는 게 서양철학의 비조인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자연은 이데아의 모방이요, 예술은 모방된 자연을 다시 모방하니까 이데아로부터 더 멀리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철학자는 예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양철학은 동양처럼 자연을 ‘스스로 그러한[自然], self-so’ 상태로 보지 않고 이데아의 모방으로 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유대교의 야훼와 결합시키면 신의 창조 의지가 되는 것이지요.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학이 만나는 그 자리. 창조의 주체가 제일 중요하고, 모방의 단계마다 중요도가 떨어집니다. 마침내 플라톤은 자신이 생각한 최고 국가인 공화국에서 예술가를 추방하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명작을 모방하는 여인의 뒤에서 보면 플라톤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 여인이야말로 창조의 주체입니다. 두 팔을 걷어 부친 채 그림에 몰두하는 여인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의 중심이지요. 모든 표현 행위가 그렇듯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세상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녀의 뒤에서 보니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예술가 역시 세상을 창조하는군요. 그래서 저는 그림의 정의를 ‘붓질로 신이 되는 놀이’라고 부릅니다. 미술관에서 그림 그리기 체험은 한낱 모방이 아닌 겁니다. ‘예술은 하느님의 세상 만들기 놀이!’ ‘표현은 사람이 신이 되는 또 다른 경험!’ 모방의 뒤에 선 순간의, 이 또한 깜짝 깨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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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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