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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수담(手談)

시계아이콘01분 30초 소요

“김지석 9단이 ‘눈목’자 걸침으로 안정을 구할 것 같은데.” “아빠, ‘날일’자 걸침을 선택했는데요.” 일요일 오전, 바둑TV에 푹 빠진 아빠와 초등학생 아들. 한국의 김지석 9단과 중국의 탕웨이싱 9단 대국을 놓고 나름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곁에 있는 아내는 무슨 ‘외계어’ 대화를 듣는 듯 무관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바둑이 부자의 공통 화제가 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들은 학교 특별활동으로 바둑 수업을 듣게 된 이후 그 매력에 빠졌다. ‘아들과 바둑을 주제로 대화하는 날이 오다니….’ 아빠의 흐뭇한 미소, 아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어리게만 생각했던 아들은 어느새 아빠와 취미(바둑)를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아들은 아빠와의 대국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한다. 아들은 아빠 전화를 받을 때마다 “아빠, 오늘 바둑 둬요”라는 얘기를 반복한다. 매일 새벽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아들과의 약속은 주말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아빠와의 대국을 기다린 이유가 궁금했다. 아빠를 이기고 싶은 마음일까, 아니면 아빠와의 바둑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일까. 넌지시 물어보니 “바둑 두는 것 자체가 좋아요”라는 답변이 이어졌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빠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토요일 오후, 두 사람의 대국이 성사됐다. 흑을 잡은 아들은 반상(盤上) 위에 9점의 돌을 깔고 아빠의 착수를 기다렸다. 몇 점을 깔기는 했지만, 아들과 승부를 겨루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한 달 전 마지막 대국을 할 때를 떠올려보면 아들은 아직 아빠와 수담(手談)을 나눌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 수를 두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여유를 부리다가 망신을 당하겠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늘었나.’ 아들은 귀에서 안정감 있게 집을 지을 줄도 알았고, 위기 상황에서는 쌍립(雙立) 연결을 통해 단단하게 방어할 줄도 알았다.


상대의 돌을 잡으려 무리한 행마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바둑 초보들이 흔히 범하는 싸움 일변도 바둑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들은 바둑 실력은 부족했지만, 자신의 바둑을 두고자 노력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어찌 아빠 미소를 감출 수 있으랴.


바둑은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다. 바둑의 세계에 들어섰다면 승리의 기쁨은 물론이고, 패배의 쓰라린 아픔도 무수히 경험하기 마련이다. 승리를 구하고자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는 ‘꼼수’의 유혹에 빠질 때도 있다. 승리지상주의가 만든 부끄러운 모습이다.


아들은 승패의 갈림길에서 평정심과 원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나간다면 바둑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인생의 스승 역할을 할 텐데…. 하지만 욕심을 제어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바둑은 물론 삶에서도 눈앞의 이익을 좇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불혹을 훌쩍 넘긴 아빠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나이 어린 아들이 해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닐까. 욕심을 감추지 못하며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모습…. 인생수련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스스로 되묻게 한 장면이다.


류정민 산업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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