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2017년이 시작됐다. 정치적 불확실성도 크지만 경제적으로도 걱정거리가 많다. 2% 초반의 낮은 성장률과 내수 부진도 걱정이고 대외 무역환경도 불안하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좌충우돌식 경제·외교 정책을 구사할 것이라는 전망은 더 큰 두통거리다. 게다가 중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배치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이다. 더 큰 변화는 물 밑에서 드러나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바로 인구 구조의 변화다.
2017년은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14%를 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해다. 또한 올해는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감소하는 해이기도 하다. 노인 인구는 늘어나고, 한참 일할 나이의 인구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인구 구조가 변하면 경제도 변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것처럼 나라 경제도 나이를 먹는다. 청년처럼 활력이 넘치는 시기를 지나, 성숙한 경제, 노쇠한 경제로 넘어간다.
정초에 번뜩 떠오른 단어가 '묵다'이다. 그만큼 필자도 묵었다는 얘기다. '묵다'는 크게 3가지 뜻을 지녔다. 첫째, '나이 들다', '오래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묵은 장맛, 묵은 때, 백년 묵은 여우, 묵은 상처, 묵은 거지와 같이 사용된다. 그리고 '묵다'는 '머무르다'는 뜻도 있다. 마지막으로 '묵다'는 '먹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영화 '친구'에서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라는 대사가 유행한 적도 있고, '밥 문나(먹었냐)'는 '안녕'처럼 흔하게 사용된다.
앞으론 '묵다'라는 단어에 익숙해질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를 지나 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됐다는 것은 그만큼 묵은 사람들(노인들)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이고, 우리 주변에 '묵은 것들'(음식, 도시, 음악, 책, 기업 등)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냥 '오래된 것', '묵은 것'을 칭송하고 섬기자는 꼰대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것을 토대로 삼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것을 창조하면서도 능히 전아함을 잃지 않는다면, 요즘 글이 바로 옛글"이라고 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의미를 살려보자는 것이다.
'법고창신'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제자이자 막역한 친구였던 박제가(1750~1805)의 문집(초정집) 발간을 기념해 써준 서문에 들어있다. 재기발랄하고 신선한 문체의 '열하일기'를 써서 요즘으로 치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암의 글쓰기 철학이기도 하다.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요즘이야말로 연암이 얘기한 법고창신의 정신이 필요하다. 1970년대에 신발산업이 한물갔다고 버렸지만, 신상품 '나이키 에어'는 15만원이 넘는 비싼 신발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숙련된 기술로 고부가가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묵은 것'은 한물간 것이나 낡은 것이 아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음미해보면 묵은 것이 더 맛있고, 묵은 도시가 더 아름답다. 묵은 사람이 더 향기롭고, 묵은 음악이 더 감미롭고, 묵은 기업이 더 새롭기도 하다. 얼마 전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자벨 위페르'가 열연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이 시사하는 바처럼 '묵다'는 '다가온다', '거부할 수 없다',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에 에른스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고 했다면, 이제 나는 '묵은 것이 아름답다(old is beautiful)'고 해야겠다. 그 속에 경기 회복과 일자리 창출의 해법도 숨어 있기 때문이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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