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고전 재해석한 한태숙 연출의 작품…30일까지 국립국악원 우면당서 공연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숨은 주인공은 '레이디 맥베스'다.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도 맥베스는 망설인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런 남편에게 칼을 쥐어주며 던컨 왕을 살해하도록 부추긴다. 남편이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할 때마다 그 나약함을 꾸짖는 일도 부인의 몫이다. 정작 왕위를 찬탈한 뒤, 극도의 불안과 공포로 몽유병에 시달리다 끝내 먼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인물 역시 '레이디 맥베스'이다. 원작에서는 "왕비가 죽었습니다"라는 대사 한 줄로 그의 죽음을 처리한다. 하지만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보다 더 냉혹하고, 더 잔인하다. 더 강하고, 그만큼 더 처연하다.
연출가 한태숙(66)은 '맥베스'를 뒤에서 조종한 '레이디 맥베스'를 눈여겨봤다. 1998년 첫 선을 보인 연극 '레이디 맥베스'가 그 결과물이다. 작품은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에 깊이 침투한다. 권력에 대해 점점 커지는 욕망, 그 반작용으로 점점 깊어지는 죄의식. 양 극단을 오가며 파멸의 길로 내달리는 이 여인의 심리를 한태숙은 목을 휘감고 도는 밀가루 반죽, 허공에 매달린 커다란 두상 등 다양한 오브제로 표현했다. 초연 당시 '레이디 맥베스'는 서울연극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백상예술대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폴란드, 일본,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도 여러 축제에 초청돼 반향을 일으켰다. 2008년에는 예술의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관객을 대상으로 선정한 '최고의 연극' 1위에 올랐다.
이미 공연계의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에 연출가는 한 차례 더 모험을 감행했다. 21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 무대에 오른 '레이디 맥베스'는 연극과 오브제극(물체극)의 결합을 넘어 이번에는 '창극'까지 접목시켰다. 서양의 고전을 우리의 소리와 만나게 하는 색다른 시도다. 판소리는 물론이고 전통 성악인 정가(正歌)가 흘러나오면서 한국적 정서가 덧입혀졌다. 창극에서 서술자 역할을 하는 '도창' 역할도 새롭게 설정했다. 도창은 드라마를 넘나들며 때로는 해설자, 때로는 극중 인물이 되어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우아하고 유장한 소리로 유명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염경애(44) 명창이 도창을 맡았다. 가야금, 피리, 타악 등 국악기와 저음을 담당하는 콘트라베이스가 만들어내는 하모니 역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태숙 연출가는 지난 16일 간담회에서 "예전부터 '레이디 맥베스'의 강렬한 주제와 함축적인 대사가 '창'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기본적으로 창을 좋아하고,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다만 이번 작품은 전통 창극이라기보다 서양 음악의 요소를 가져오고, 노래하는 방식은 오페라 아리아 같은 느낌이 들도록 연출해 현대 관객의 정서에 맞췄다"고 했다. 음악을 맡은 국립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 출신의 작곡가 계성원(46)은 "이미 연극적으로 완성도가 탄탄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안에 음악이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공연이 펼쳐지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은 마이크와 스피커를 쓰지 않는 자연음향 공연장이다. 때문에 "악기 편성을 최소화했고, 연주 음향과 배우의 소리가 균형을 맞춰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 압축한 뒤 재해석했다. 왕권을 빼앗은 기쁨도 잠시, '레이디 맥베스'는 불안 때문에 몽유병 증상이 악화된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궁중의사 전의(典醫)와 시종들은 "생각해보세요. 마마께서는 이미 그 날로 가 계십니다"라며 최면을 유도하고, '레이디 맥베스'는 섬뜩했던 그 날의 일을 재현하며 고통스러워한다.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보며 "이 씻어지지 않는 자국… 강물아, 흘러 넘쳐 이 손을 씻어다오"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파멸해가는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이 강렬하다. 연출가는 말한다. "이 작품을 할 때 맥베스의 일부를 잘라내서 셰익스피어를 훼손했다는 반응이 있었는가 하면, 셰익스피어 전공자들은 맥베스의 주제가 더 강조되어서 좋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본을 잘 만들어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는데, '레이디 맥베스'는 다른 여지가 있다. 버전을 달리 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게 나에게는 힘이 됐다."
창극으로 탈바꿈하면서 그동안 '레이디 맥베스'의 분신과 같았던 연극배우 서주희(50)를 대신해 스타 소리꾼 정은혜(32)가 주인공을 맡았다. 연출가와 정은혜는 이미 '단테의 신곡', '장화홍련'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정은혜는 "나이테가 있는 작품에 늦게 승선해서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며 "우리 소리가 입혀져서 이 극을 새롭게 선보인다는 것 자체가 용기있는 도전이다"라고 했다. 1999년부터 이 작품을 함께 해 온 배우 정동환(67)은 맥베스와 궁중의사 역을 오가며 무대를 누빈다. 그는 "내 나이 쉰에 이 연극을 처음 봤는데, 너무 좋아서 다음 공연부터 나도 끼어달라고 한 게 지금까지 왔다"며 "했던 것을 반복하면 나태해지게 마련인데 새롭게 창극에 도전하니 그만큼 신선하다"고 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탐하는 맥베스, 막후 조종자인 그의 부인, 최면에 취한 부인을 농락하려드는 전의와 시종들. 오래된 고전에서 우리는 의도치않게 기시감을 느낀다. "왕이 되기 위해 기존의 왕을 밀어내고 적법성이 없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정적들을 처치하는 건 수없이 되풀이 되는 역사일세" 등 시국을 겨냥한 듯한 대사와 장면이 흘러넘치지만 작품을 구상한 시기는 올해 초다. 정동환은 "우리는 결벽증이 있어서 일부러 대사 한 마디도 고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국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며 "양심과 욕심은 한 몸의 두 머리다. '레이디 맥베스'는 자신의 욕심을 양심으로 포장하곤 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연출가는 "공연에만 집중할 수 없는 시국"이라고 한탄했다.
"권력의 과한 탐닉이 가져온 종말 부분이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복잡하게 사유를 표현하지 않더라도 공감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공연은 30일까지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한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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