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살며 생각하며] 미꾸라지 공화국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17초

[살며 생각하며] 미꾸라지 공화국
AD

정말로 미꾸라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언제부턴지 이 땅에서 미꾸라지가 밉상이 돼 버렸다. 미꾸라지 명예를 실추시킨 일등공신으로 시중에서는 대체로 김기춘이라는 옛 비서실장을 꼽는 모양이다. 앞뒤 정황이 너무나 명백해 밝은 직관으로 봤을 때 분명 사실인데도 죄 없는 기억력에 기대 시종일관 ‘모른다, 기억 안 난다’로 사실을 부인하는 거짓말의 달인. 여기에 알량한 법률지식에 기대 요리저리 불리한 상황을 피해나가는 우병우 같은 이에게는 ‘법률 미꾸라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꾸라지 한 마리로도 온 우물물을 흐린다고 했거늘, 미꾸라지들이 떼로, 그것도 윗물에서 활개 치다 보니 나라가 어느 곳 하나 정갈할 데 있겠는가.


‘박근혜는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다. 눈앞의 유불리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다. 아무개 같은 쥐새끼나 미꾸라지 공직자들과는 완전 차원이 다른 정치인이다.’ 4년 전 다수의 국민들이 이렇게 믿고 그녀를 대통령으로 뽑아줬다. 그런데 이번 박 대통령측이 낸 탄핵심판 답변서를 보면 그 ‘청정’했던 정치인이 미꾸라지들 틈에서 왕미꾸라지로 몰락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선 국민에 대한 생명보호의무를 위반했다는 세월호 7시간 항목부터 살펴보자. 대통령측의 항변은 이렇다. “생명보호 의무 위반으로 보기 위해서는 보호의무에 대한 의식적 포기행위가 있어야 된다. 세월호 당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하면서 유관기관 등을 통해 피해자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단순히 직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않았다거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명보호 의무 위반으로 보기는 어렵다. 소추인 주장대로라면 모든 인명 피해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생명권을 침해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살며 생각하며] 미꾸라지 공화국


즉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보호라는 헌법상 의무를 위배했다고 단정 짓기 위해서는 피해자구조라는 생명보호행위를 의식적으로 포기했거나 방임했다는 사실이 인정돼야 하는데, 세월호 당일 대통령은 이를 의식적으로 포기한 사실이 없다. 따라서 생명보호 의무이행이라는 헌법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 측은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직무유기죄에 대한 대법원의 해석- 형법상 직무유기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관한 단순태만 정도가 아니라 의식적인 방임이나 포기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을 들고 있다.

얼핏 보아 그럴싸하지만 이는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탄핵심판이지 형사재판이 아니다. 형사재판이야 죄가 있고 없음을 따지는 자리이지만, 탄핵심판의 선택지는 공직 파면-공직유지 둘 중 하나이다. 국민의 신임을 저버려 국정을 운영할 자격을 상실했느냐가 선택지의 판단기준이다. 대통령 측이 주장하듯 세월호 사고 당일 대통령이 의식적으로 직무 수행을 포기했느냐가 쟁점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생명구조라는 본연의 헌법상 의무를 제대로 이행했느냐가 포인트다. 당시의 직무수행태도에 비추어 국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리라는 국민의 믿음이 상실됐느냐, 더 이상 믿고 국정을 맡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느냐가 관건이라는 이야기이다.


잘 알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일개 여객선의 교통사고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적폐를 송두리째 짊어진 ‘대한민국 호’ 침몰 사고였다. 사고 당일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전령이 보고서를 든 채 자전거로 청와대 경내 여기저기를 라이딩했다는 안보실장의 전언은 분노, 허탈, 기막힘의 언어도단이다. 세월호 당일에 이어 수색 작업과 세월호 참사의 구조적인 진상규명에 과연 최선을 다했느냐…. 바로 이런 게 문제의 포인트인 것이지, 대통령은 세월호 7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했고, 이는 의식적으로 직무수행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객관적 증거에 해당된다느니 하는 알량한 궤변은 그만 늘어놓으라는 이야기이다.


이들이 탄핵심판절차와 형사재판절차의 본질적 차이를 몰라서 형사피고인의 변호인이나 함 직한 이런 주장을 내놓았을까. 이번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은 사실상 ‘국민소환’ ‘국민파면’의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국민이라는 선출권력이 선출한 공직자가 국민에 대한 신임을 저버렸을 때 이들에 대한 해임권 파면권을 행사하는 것은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만큼 당연하다. 그런데 현실은 이를 담아낼 국민소환 등의 장치가 없는 제도흠결 상황이다. 바로 이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국회를 통한 탄핵소추 경로를 밟게 됐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럼에도 이들은 국민의 탄핵의사가 분명해졌다는 이유로 탄핵을 소추한 것은 그 자체로 헌법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대통령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재단에 돈을 냈다고 인식했다든지, 최순실 등의 사익추구를 대통령이 몰랐다면 탄핵소추사유는 법적근거를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답변서에 나타난 이들의 주장은 눈에 보이지 않은 ‘인식’에 기대 향후 심리에서 대통령이 여차하면 ‘몰랐다’든지, ‘그렇게 알았다’든지 주장하겠다는 암수를 담고 있는 궤변이다. 국민이 국정을 믿고 맡길 대통령은 국정에 대한 헌신은 물론, 사리분별이 명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지닌 기초자질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초자질 부족은 그 자체로 신임철회, 탄핵사유라는 이야기이다. 기초자질 부족을 탄핵방어 전략으로 삼겠다는 ‘똑똑 미꾸라지’들의 어설픈 몸부림이 안타깝다.


류을상 논변과소통 대표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