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치어다본 하늘은
女眞의 가을이다
구름들은 많아서 어디로들 흘러간다
하늘엔 가끔 말발굽 같은 것들도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女眞의 살내음새 불어온다
가을처럼 수염이 삐죽 돋아난 사내들
가랑잎처럼 거리를 떠돌다
호롱불,
꽃잎처럼 피어나는 밤이 오면
속수무책
구름의 방향으로 흩어질 것이다
어느 女眞의 창가에
쌓일 것이다
밤새 여진여진 쌓일 것이다
AD
어떤 시는 그저 단어 하나 때문에 오랫동안 곁에 두고 자꾸 읽고 새삼 생각하고 그렇게 된다. 이 시의 "속수무책"이 그렇다. '속수무책'은 손이 묶인 듯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시를 쓰거나 읽는 마음의 어느 한 끝자락으로 이 단어를 들고 싶을 때가 있다. 비가 내린다. 속수무책이다. 하늘이 맑다. 속수무책이다. 나비가 난다. 속수무책이다. 먼 저녁 속을 개가 컹컹 짖는다. 속수무책이다. 친구가 문득 보고 싶다. 속수무책이다. 아까 내렸던 소나기가 다시 내린다. 속수무책이다. 술이 떨어졌다. 속수무책이다. 자정이 지나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당신이 걸어간 골목길을 따라 눈이 내린다. 속수무책이다. 마른 꽃이 아직도 지지 않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노모가 금강경을 읽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오늘도 청첩장과 부고를 전해 받았다. 속수무책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뜬눈으로 다시 출근한다. 속수무책이다. 곧 크리스마스다. 속수무책이다. 속수무책이고 속수무책이다. 도무지 어찌할 도리 없이 속수무책이 쌓인다. "여진여진" 쌓이고 또 쌓이려 한다.
채상우 시인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