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집에는 못이 많이 박혀 있었다
못을 박을 일이 많은 집이었다
못을 빼지 않아도 살 만한 집이었다
나는 제일 작은 방에
모자를 걸었다
속옷을 걸었다
바지를 걸고 그 위에 코트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귀를 걸고
조용한 세계로 빠져나왔다
화장실에는 여러 개의 못에 입이 걸려 있었는데
씻을 때마다 통곡하는 입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와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를 해대는 입
빈집이어도 소란한
화장실에서 나는 자주 토했다
못을 빼내려고 한 적이 물론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복장을 치며
가슴에 박힌 못에 대해 얘기하곤 했을 때
가슴에 박힌 못이 아니라 엄마를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게 된 후로
한번 박힌 못은 빼지도 더 박지도 말고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후략)
그런 집이 있다. 못이 많이 박혀 있는 집 말이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사는 집은 온 사방 벽이 못들로 가득하다. 그런 집에 가 보면 녹슨 못들마다 옷도 걸려 있고 모자도 걸려 있고 가족사진도 걸려 있고 족자도 걸려 있고 달력도 걸려 있고 마늘도 걸려 있고 시래기도 걸려 있고 북어도 걸려 있고 광주리도 걸려 있고 그렇게 왠지 모를 쓸쓸함과 그리움이 벽마다 한가득씩 걸려 있다. 그런데 시를 읽어 보면 그뿐만은 아닌 듯하다. 특히 저 세 번째 연을 보면 사연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차마 말로는 이룰 수 없는 뭔가 끔찍한 일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 일은 엄마와 관련이 있는 듯하고, 엄마는 딸에게 "복장을 치며" 자주 하소연을 하고 그랬나 보다. 그랬나 본데 정작 딸은 그런 엄마를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어쩌면 매정한 심사일지도 모르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엄마의 "가슴에 박힌 못"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 수 있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박힌 못은 빼지도 더 박지도 말고/제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이를 사려 물었는지도. 차라리 그 상처를 그 고통을 눈에 빤히 보이는 벽 한가운데다 걸어 두고 녹슬어 허물어질 때까지 함께 나누기로 했는지도.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