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400주년 맞아 연극 '페리클레스' 공연…시대풍자, 화려한 무대연출 등 볼거리 풍성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수많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은 대충 열손가락으로 간추려진다. 영국 출신의 셰익스피어 연구가 앤드루 브래들리(1851~1935)는 1904년 '셰익스피어의 비극론'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햄릿', '리어왕', '오델로', '맥베스'를 4대 비극으로 분류했다. 5대 희극으로는 '십이야', '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뜻대로 하세요'가 있다. 뭐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반영돼, 이때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4대 비극' 혹은 '5대 희극'과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 작품들로 나뉘게 됐다.
1607년에 발표한 '페리클레스'는 그런 점에서 비운의 작품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 시대에 '페리클레스'는 '리처드 3세',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였다. 당대 '굉장히 추앙받았던 극(much admired play)'으로 1630년대까지 끊임없이 관객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페리클레스'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유명세가 덜하다 못해 작품 자체에 대한 평도 엇갈린다. 우연의 남발로 인한 비논리적인 인과구조, 치밀하지 못한 스토리 구성 탓에 현대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15년에 걸쳐 5개국을 떠돌아다니는 방대한 스케일의 모험담을 무대에서 구현해내는 것도 난제였다.
국내에서는 2010년에서야 김광림(64) 연출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어 지난해 양정웅(48) 연출이 예술의전당과 손잡고 다시 선보인 '페리클레스'는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블록버스터급 무대로 호평을 받으며 올해 재공연에 들어간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았던 주인공 페리클레스와 작품의 운명이 한 배를 탄 듯하다. 올해로 서거 400주년을 맞은 셰익스피어가 이 광경을 보고 작품 속 대사를 읊조리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거친 파도가 온다 해도 잡을 밧줄이 있고, 헤어진다 해도 다시 만날 희망이 있는 것. 그것이 산다는 것 아닌가."
페리클레스는 타이어 왕국의 왕자다. 안티오크 왕국의 공주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하러 나섰다가 위기에 처한다. 왕이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죽고, 푼다고 해도 그 안에 숨겨진 비밀로 인해 죽게 되는 상황이다. 겨우 시간을 번 페리클레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며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항해 끝에 펜타폴리스 왕국에 도착한 페리클레스는 공주 타이사의 사랑을 얻어 결혼한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도 잠시. 페리클레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아내 타이사는 딸 마리나를 낳고 세상을 떠나고, 배는 태풍과 마주한다.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페리클레스' 무대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장치는 바닥 위에 뿌려진 모래다. 넓고도 깊숙한 사각 무대를 뒤덮은 50톤의 모래는 시간의 덧없음과 무수한 세월을 의미한다. 페리클레스가 인생의 고비마다 만나는 풍랑을 표현하는 데도 적절하게 사용된다. 우주와 운명을 의미하는 달의 모습과 달의 여신 다이애나의 반쯤 누워있는 머리도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시간이야말로 인간을 지배하는 제왕이다. 시간은 인간의 부모이자 무덤이며, 자신이 원하는 건 주지만 정작 인간이 원하는 것은 주지 않는다"며 페리클레스가 한탄할 때, 다이애나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듯 보인다.
막이 오르면 객석에서 무대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가우어'이다. 셰익스피어 모든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해설자다. 그의 손짓에 구석에 있던 촛불에 불이 붙고, 무대의 조명도 켜진다. "그 옛날부터 읊었던 시를 노래해 그대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려 약점 많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한 줌 재로부터 살아 돌아온 배우 가우어올시다"라고 능숙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가우어는 극이 펼쳐지는 내내 사건에 끼어들거나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며 이 복잡한 이야기를 정리해준다. '가우어'와 노년의 페리클레스 역을 맡은 배우 유인촌(66)은 무대 위 모래를 고르며 "연기하면서 이렇게 많이 모래가 깔린 것은 처음 봐요. 여기 모래가 50톤이나 들었어요"라며 관객들에게 말을 걸며 자연스럽게 2막의 시작을 알린다.
원작에서는 페리클레스가 안티오크, 타서스, 펜타폴리스, 미틸레네, 에베소 등 여러 왕국들을 방랑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했다. 자칫 산만하고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양정웅 연출은 다양한 볼거리와 무대 연출로 긴장감을 높였다. 발리우드 스타일의 군무, 광고와 예능프로그램 패러디, '아프리카 청춘이다' 등 익살맞은 대사 등이 웃음을 유발한다. 양정웅 연출은 9일 간담회에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생전에 '리처드 3세'와 더불어 가장 흥행한 작품"이며 "엘리자베스 시대의 고전 연극이라고 하면 점잖을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그 시대에도 음악과 춤 등 대중적으로 호흡하는 부분이 많았다. 나 역시 21세기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재미나면서도 만화적인 아이디어를 인용했다"고 했다.
현 시국을 빗댄 장면도 인상적이다. "왕이 좀 똑똑해졌으면 좋겠다", "국민들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왕", "우주의 기운" 등의 대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양 연출은 "원작에서도 시대를 풍자하는 대목이 많다. 젊은 왕과 페리클레스의 대화 장면에서 어진 왕이란 어떤 것이고, 아첨이 어떻게 국가를 망치는지에 대한 부분이 있다"며 "나라 안팎으로 큰 일이 많아서 그런지 올해는 저절로 그런 부분들이 강조가 됐다"고 했다.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전 문화부 장관(2008~2011년 1월)인 유인촌은 "요즘의 사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다"며 "정부 부처 가운데 문화부가 가장 피폐해졌다. 지시를 받고 맡은 바 일했던 공무원들의 자존심에 상처가 났을 거다. 국민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 작품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페리클레스는 잃어버렸던 딸을 되찾고, 죽은 줄 알았던 아내도 살아 돌아온다. 후에 T.S. 엘리엇은 딸을 다시 찾은 페리클리즈의 경이로운 감정을 '마리나(1930)'라는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모진 고난과 풍랑을 겪으면서도 끝내 '이 희망 속에서 나는 살아간다'고 말하는 페리클레스의 모험담은 우리의 인생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1막에 비해 2막이 다소 늘어지는 점을 감안해도 무대 위로 다시 돌아온 '페리클레스'의 복귀는 성공적이다. 양 연출은 "각자 생각하는 희망의 모습은 다르겠지만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 젊은 '페리클레스' 역은 유인촌의 아들 배우 남윤호(33)가, 페리클레스의 딸 '마리나'는 전성민(31)이 연기한다. 12월4일까지 예술의전당.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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