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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타계 뒤 청와대에 편지 보내 "어머니 목소리 듣고플 때 날 통해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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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눈]최태민과 딸 최순실에 관한 궁금증 리포트②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1. 최태민(1912-1994)


육영수 여사 타계 뒤 청와대에 편지 보내 "어머니 목소리 듣고플 때 날 통해 들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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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있다. 1976년에 찍은 것이다. 코트를 걸친 채 소파에 앉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손을 들어 검지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왼짝 2인용 소파 한쪽에 정중하게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그는 살짝 색이 들어간 안경을 끼고 있는 멋쟁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소파에 앉은 사람은 박근혜 당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이다. 박명예총재는 최태민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당시 최태민은 이 단체의 총재였다. 박대통령이 밤에 선교단의 야간진료센터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최태민이 권력의 명실상부한 측근임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

최태민은 1912년생이며 황해도 봉산군 출신이다. 1994년 81세로 사망했다. 그는 해방전인 일제 치하에서 3년간 황해도경의 순사를 지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뒤 그 다음달인 9월에 강원도경 소속 경찰이 된다. 이후 대전경찰서 경사, 인천경찰서 경위를 지냈고 1949년 이후 헌병대와 해병대의 비공식 문관을 지내다가 전쟁통에 군복을 벗는다. 전쟁 중인 1951년 비누공업협회 이사장과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을 맡았다. 1954년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여자문제로 고소를 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퇴운'이란 법명을 썼다. 이후 양산의 개운중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나 실제 활동은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고 70년대 들어선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합친 교리를 내세우며 특이한 종교행각을 벌였다. 그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1974년 최태민은 박근혜 영애에게 편지를 보낸다. 육영수여사가 타계한 직후였다. 김형욱회고록에 그 편지 내용이 나와 있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여기서 '이런 뜻'이라 함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딸 박근혜를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서라는 것이라고 한다. 이듬해인 1975년 3월6일 청와대에서 최태민을 부른다. 이후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목사가 된 뒤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고 스스로 총재가 된다. 최태민의 즉석제안으로 박근혜 영애는 명예총재로 추대되었다. 이후 이 단체는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 단체의 권력형 비리 의혹과 최목사의 여성스캔들이 나돌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1977년 9월 그를 심문한다. 아 자리에 김재규 부장이 동석했다. 이때 박근혜 영애는 그를 옹호했고, 이 친국(대통령의 심문) 이후에도 최씨는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건재했다. 10.26 이후 합수부는 그를 강원도로 보냈고 활동을 중단시켰다. 1980년 11월 새마음봉사단은 강제해산됐다. 그런데 1983년 1월 육영재단에서 다시 두 사람의 활동이 재개된다. 영애는 이사장에 올랐고 최태민은 막후 실세였다.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 결재를 받을 수 있었고 당시 최태민의 딸 최순실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기사가 여성중앙(1987년 10월호)에 실렸다. 1990년 이사장직은 동생 근령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최태민과 최순실의 입김에 대해 박근혜 전이사장은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말은 인격모독"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부녀의 전횡을 부인하기도 했다.


1990년 이후 최태민은 거의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다.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뜬 것으로 보인다. 이사장은 넘겨받을 무렵인 1990년 근령(다른 동생인 박서영과 박지만이라는 주장도 있다)은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에게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라고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최태민과 관련한 논란이 나올 때마다 언니(박근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입니다. 의혹은 많이 제기되었지만 실체가 없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최태민이 사망하는 1994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를 인수해 운영하기 시작한다. 1997년 12월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을 지지하며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이듬해 4월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해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 이 무렵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의 얼굴이 정치인 박근혜의 뒷편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도 최태민 가문과의 인연이 끈끈하게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근혜는 청문회(2007년 후보 검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입니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이후 당대표 때 그만뒀습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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