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론 보도에는 전형적인 형식이 하나 있습니다. 사례와 통계를 통해 현안을 서술한 다음, 분야 전문가의 의견이 달립니다. 흔히 교수들이 전문가 노릇을 하면서 남의 일에 훈수를 두곤 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훈수나 둘 시절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대학들이 거대한 변화의 시절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대학에서 일어난 학생들과 본부의 대립은 그 한 상징입니다. 최근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사태가 당장 내일 열 곳의 다른 대학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대학이 어떤 곳인지, 또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각각 다른 생각들이 학내외에서 이리 저리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수년간 정부는 대학이 사회, 특히 기업의 수요에 잘 부합하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입장을 지켜왔습니다. 기업들 입장에서 채용 후 훈련비용이 과다하다는 불만은 꽤 오래된 것이지요. 저도 직장에 다닐 때,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이것도 못해"라고 신입사원을 타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대학은 그 탄생부터 당대 사회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지켜온 제도입니다. 중세대학들은 지역이나 국가와 분리된 별도의 법률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고, 근대 대학들 역시 권력과 사회로부터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양하고 자율성인 학문의 추구가, 역설로 혁신적인 지식을 창출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더 이익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헌법(31조 4항)에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새삼스러운 내용이 담겨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 경험 덕분입니다.
한가한 소리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 있겠지요. 세상은 1초가 다르게 바뀌는데, 대학과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주장 뒤에 슬쩍 숨어 케케묵은 강의노트나 우려먹는다는 비판은 뼈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학이 미래직업 수요를 정확히 예측한 다음 이에 꼭 맞는 전공분야를 개설해 학생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이에 따른 정책들에 대해서는 의심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나온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수백만 구인광고를 분석해 보았더니 기업들은 대졸자를 뽑을 때 주로 소프트스킬(Soft Skill)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협업능력과 같은 것이지요. 이에 비해 아주 구체적인 전공능력을 학부졸업생에게 요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공적인 창업자들에게 대학교육의 가치를 물었던 또 다른 연구는 대학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공부와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최적의 장소라고 여겨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학의 선생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곧 대학에 갈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도대체 어떤 전공과 어떤 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을지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사회에서 성공한 선후배들을 만나면 그 직업의 현재와 미래 전망에 대해서 늘 물어보곤 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느낀 것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그 직업의 20년 후를 자신 있게 예측하지는 못하더라는 점이었습니다. (저 역시 교수라는 직업의 20년 후를 잘 모르겠습니다) 산업과 직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도 이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변수까지 넣으면 예측이 아니라 점괘가 될지도 모릅니다.
대학에 대한 사회의 싸늘한 시선과 변화 요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요구가 어떤 전공분야의 인력을 더 키우라는 수준인 것은 적잖이 안타깝습니다. 이전과는 좀 다른 교육 방식으로, 이전과는 좀 다른 역량을 갖춘 인력을 키우는, 그리하여 인공지능과는 매우 다른 '사람다운' 사람을 배출하는 대학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더 넓어지면 좋겠습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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