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산세가 굽었다 펴지고 높았다 낮아지면서 마치 내리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비슷하고, 높은 바위와 층층의 절벽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공손히 절하는 듯한 것은 부처와 같다. 평평하고 넓으며 멀리 흩어져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닮았고, 북쪽을 향해 곱게 껴안은 듯한 수려한 자태는 꼭 사람처럼 보인다."
조선 후기 문신 최익현(1833~1906)이 1875년 5월 나이 마흔세 살에 ○○산에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의 일부다. ○○산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 난 산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 산을 가본 이가 드물었다. 최익현이 사람들에게 "○○산의 명승은 천하에 이름이 났는데도 읍지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산을 구경했다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 물을 정도였다.
어떤 산인지 짐작이 가는가. 더욱 확실한 실마리를 주는 구절이 여기 있다.
"○○산은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이지만 큰 바다의 기둥이요, 삼천리 한반도 해양의 입구이며,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도 못하는 곳이다." "북쪽 가에 갑자기 움푹 파인 구덩이가 나타났는데 바로 백록담이었다. 둘레는 1리가 넘었고 수면은 잔잔했는데 반쯤은 물이었고 반쯤은 얼음이었다.(중략) 아주 맑고 깨끗한 것이 마치 신선이라도 숨어 사는 듯하였다."
그렇다. ○○산은 바로 제주도의 한라산이다. 최익현은 민씨 일족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뒤 한라산을 유람했다. 원제는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이다.
그는 "산해진미 가운데에서 임금에게 바쳐지는 것도 이곳에서 많이 나오며, 공경대부와 일반 백성이 쓰는 필수품이 이곳에서 공급된다"며 "백성에게 미치는 이로움으로 본다면 저 지리산과 금강산처럼 다만 사람들에게 볼거리만 제공해주는 것과 어찌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한라산을 칭송했다.
새책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팔도의 명산 스무 곳을 유람한 기록들을 묶었다. 이황의 소백산, 유몽인의 두류산, 김효원의 두타산, 안석경의 치악산, 채제공의 관악산 등에 대한 감상을 한 데 펼친다.
조선 선비들이 산과 물을 찾는 목적은 현대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저자는 "건강을 위해 산을 오른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선비들이 산수를 즐겨찾은 이유는 무엇보다 성현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들의 산수체험기록의 1차 독자는 자기 자신이었다. 2차적으로 여러 이유로 산수를 찾지 못하는 선비들을 위해 기행문을 썼다.
이황은 소백산 기행문인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이 산의 문턱 정도만 거닐어 본 우리 같은 자들이 어찌 산의 장단점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면서도 "본 것을 차례대로 엮고 기록하는 것은 훗날에 이 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나의 글을 읽고 느끼는 점이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기행문마다 선비 저마다의 개성이 엿보인다. 삼척 부사 김효원은 두타산 기행문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 예법에 관한 자신의 논설을 담았고 산에 대한 나름의 진중한 철학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의 한 대목이다. "산은 그 푸른빛을 받아들여 천고토록 없어지지 아니하듯, 군자도 그 산의 모습을 보고서 명예와 절조를 갈고 닦아 우뚝하게 홀로 선 자를 생각해야 하네."
남원 수령 유몽인은 두류산 기행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산의 곳곳을 눈에 보이듯 실감나게 묘사했고, 자연을 통해 때로 자신만의 인생론을 펼쳤다.
저자는 "산을 찾을 시간이 없는 독자들은 방 안에 누워 이 책을 읽으며 선비들이 보았던 나무, 숲, 계곡, 폭포를 쫓을 것이고,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직접 산을 찾아가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물아일체의 경험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고 했다.
<전송열ㆍ허경진 엮고 옮김/돌베개/1만8000원>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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