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베이징=김혜원 특파원] "처음부터 끝까지 법적 문제를 가장한 정치 코미디다. 본질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중재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 근거한 국제 법치와 지역 규정을 준수할 것이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국제 판결이 나오자 중국 정부는 사실상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며 격앙된 반응과 함께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둔 상설중재재판소(PCA)가 12일(현지시간) 원고 측인 필리핀의 손을 들어준 것은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결과였지만 앞서 조기 결정된 한미 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까지 맞물리면서 중국이 외교적 고립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반면 남중국해 영유권의 숨은 당사자 격인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주요 2개국(미국·중국) 패권 경쟁에서 한 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판결의 핵심이었던 남해구단선을 결국 사수하지 못하면서 중국은 그동안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던 명분도 잃게 됐다. 남해구단선은 중국이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U자 형태의 9개 선으로 남중국해 전체 해역의 90%를 차지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직접 나서 "남중국해 도서는 중국 영토"라며 "중재 판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분쟁의 불씨는 확산 분위기다. 필리핀과 베트남 등 당사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이 합심해 남중국해 영유권을 발판으로 아시아 맹주 자리를 차지하려는 중국의 발목을 잡고 있어 돌파구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일단 대화와 협상의 평화적 해결법을 찾겠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지만 연관 국가에 대한 경제적 보복은 물론 군사적 충돌까지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베이징의 한 외교 소식통은 "갑자기 외교적 고립 상황에 처한 중국이 특히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은 반드시 할 것"이라며 "대기업과 관광, 한류 등 가시적 효과가 큰 분야부터 건드릴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사드에 이어 남중국해 판결까지 일련의 사태로 이득을 본 곳은 북한과 일본이며 손해를 본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중국과 필리핀은 '사후 중재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중국 내부의 목소리도 나왔다. 주펑(朱峰) 난징(南京)대학교 교수는 봉황망(鳳凰網)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에 불리한 결과지만 국제 분쟁에서 한 쪽만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법은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주 교수는 "중국과 필리핀 양측은 외교상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며 "군사 전쟁이 아닌 법률상, 외교상, 여론상의 사후 전쟁이 시작됐다"고 판단했다. 이어 "남중국해 문제의 핵심은 중국과 미국 간 전략 싸움에 있다"며 "서로 생각을 정리하고 주고 받는 전투를 벌이면서 천천히 진행돼야지 누구도 서로에게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중국 언론은 필리핀 고위 인사의 말을 인용하는 등 우호적 환경 조성을 위한 여론전에 나섰다. 중국장시망(中國江西網)은 필리핀 전 교육부 부부장 안토니오 발데스가 "이번 판정으로 이득을 보는 쪽은 필리핀이 아닌 미국"이라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필리핀의 저명한 정치 평론가 라오레이얼은 "중국과 필리핀이 양국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미국이 원하지 않는 결과"라며 "미국과 일본은 이익을 독점하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필리핀 전 하원의원 사투르 오캄포는 "이번 문제로 중국과 필리핀이 충돌한다면 미국이 필리핀에 간섭할 수 있는 구실이 생겨버린다"고 말했다.
베이징 김혜원 특파원 kimhy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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