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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대통령의 폭탄선언 '금융실명제', 세상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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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대통령의 폭탄선언 '금융실명제', 세상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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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1993년 8월12일 오후 7시45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1층에서 특별담화문을 읽었다.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융실명제'의 시행이었다. 시행시점은 담화문 발표가 끝나는 오후 8시였다. 그 시간 이후로 은행·증권·보험 등 모든 금융 거래에서 비실명 거래자는 두 달 내에 실명으로 전환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 "김 전 대통령이 아니면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금융실명제는 그의 직관적 통찰력과 추진력에서 비롯됐다. 부패를 척결하고, 경제개혁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서는 전격적인 조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는 실무진 전원으로부터 사표를 받아뒀다. 이어 "보안이 새어나가면, 실무진들은 전원 구속시킬 것"이라며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는 공무원 20명은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두 달 간 집에도 가지 못하고 경기도 과천의 주공아파트에서 합숙을 해야 했다. 일부 공무원은 해외로 출장을 나갔다가 귀국 후 곧바로 합숙소로 갔고, 출국을 위해 공항에 갔다가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연행되듯 합숙소에 합류하기도 했다.

1982년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 터지면서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지만, 전두환 정권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도입하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저축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지만,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히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김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발표하자 정치권과 재계는 발칵 뒤집혔다. 증시는 발표 직후 이틀 동안 8.2%나 폭락했다.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는 "초기에 성장률이 1~2%포인트 정도 떨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라며 밀어부쳤다.


증시는 단기간에 안정을 되찾았고, 한국 경제에 대한 대외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정경유착의 고리였던 불법 정치자금이 크게 줄어들었고, 비실명계좌를 통한 탈세와 자금세탁도 어려워졌다. 검찰의 자금추적이 용이해지면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등 대형 비리사건이 잇따라 적발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로 갈 곳을 잃은 지하자금은 금과 부동산으로 몰렸다. 김 전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는 더욱 거세졌다. 1995년 1월에는 '부동산실명제' 도입을 발표해 차명 거래를 금지했다. 같은 해 7월1일부터 이듬해 6월30일까지 1년 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모든 부동산을 실명으로 등기하도록 했다. 부동산 탈세와 투기 방지를 막는 데 획기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취임 3일 만인 1993년 2월27일 첫 국무회의에서 재산을 공개한 것도 직관적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라고 밝혔다. 당시 김 전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 여사 명의로 상도동 자택과 헬스클럽 회원권, 선박 등 6억8000만여원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재산공개 이후 3개월도 되지 않아 국회에서 공직자윤리법이 통과됐다. 그해 9월6일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1급 이상 공직자 1160여명의 재산이 일괄 공개됐고, 지금은 공직자의 첫번째 덕목인 청렴성의 잣대로 활용되고 있다.


규제개혁에서도 김 전 대통령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1993년 6월 '기압활동 규제 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1997년에는 '행정규제기본법'을 만들어 규제개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창업, 공장입지, 자금조달, 시장진입 등 행정절차가 간소화 됐고, 6000여건의 규제가 개선됐다.


김 전 대통령의 직관적 리더십은 하나회 청산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취임 13일이 지난 1993년 3월8일 아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조찬을 함께 하며 하나회 출신인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권 장관이 "정기 인사 때가지 미루자"고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당장 인사를 단행하도록 했다.


12·12 쿠데타를 주도하고 5·6공 정권의 실권을 쥐었던 하나회 청산의 시발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하나회 장성들이 반발하자 "개가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며 고삐를 죄었다. 임기 초반 하나회를 뿌리뽑으면서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수사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결국 이들 두 전직 대통령은 법정에 섰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한 발 나아가게 됐다.


고은 시인은 시집 '만인보(萬人譜)'에서 '79년 여름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그의 직관적인 결단으로/YH 노동자들 신민당 강당 농성을 승낙해주었다/그것이 유신체제가 쓰러지는 바퀴소리인 줄이야'라고 썼다. 그가 바로 김 전 대통령이다.




세종=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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