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ㆍ숲ㆍ바다ㆍ노을이 그린 태안 명품 해변길 1코스 바라길을 가다
[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바람이 붑니다. 모랫바람이 언덕을 넘어 흩어집니다. 바닷바람이 쓸고 간 모래언덕에는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물결을 비집고 표범장지뱀이 날랜 걸음을 재촉합니다. 솔잎이 깔린 숲을 지나면 푸른 바다가 길을 내어줍니다. 철 지난 바다는 수정처럼 맑고 깨끗합니다. 바구니를 챙겨 갯가 일을 나서는 어머니의 굽은 허리와 거친 손마디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서해바다가 붉은 물결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태양이 해변의 노송 가지에 걸리자 기다렸다는 듯 갈매기들이 힘찬 날갯짓을 합니다. 실루엣으로 변한 여행객은 장엄하게 지는 해 속에 빨려듭니다. 붉게 달군 하늘은 어느새 어둠을 몰고 옵니다. 밤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비릿한 바닷내음이 상쾌합니다.
태안 '바라길'을 걸으면서 만난 풍경들입니다. 바라길은 '아라'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아라는 바다의 옛말이죠.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 바라길은 태안 해변길의 제1코스입니다. 신두리 해안사구와 해변과 해변을 잇는 아름다운 소나무숲과 바다를 두루 걷는 길입니다.
태안 해변길은 총 120㎞입니다. 태안반도 위쪽부터 순서대로 바라길, 소원길, 솔모랫길, 노을길, 바람길로 이어집니다. 이 중 태안의 북쪽에 위치한 바라길을 다녀왔습니다. 태안은 뭍에서 서해로 툭 튀어나와 위아래로 길게 뻗어 있습니다. 태안읍을 가운데 두고 아래쪽에는 안면도와 천수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쪽 안면도로 많이 갑니다. 하지만 위쪽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더 좋아하는 태안의 북쪽 바라길을 따라갑니다.
학암포 해변에서 시작해 신두리 해안사구까지 가는 바라길은 총 12.2㎞다. 천천히 걷는다 해도 5~6시간이면 넉넉하다. 가파른 구간이 없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학암포~신두리로 내려오는 코스가 아닌, 역으로 북쪽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이유는 신두리 해안사구를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신두리사구센터에 들어선다. 로비에 전시된 해안사구 사진들을 둘러보고 뒷문을 통해 사구로 향했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나 보던 사막의 느닷없는 등장에 눈이 깜짝 놀란다.
천연기념물 제431호인 신두리 해안사구는 길이 3.4㎞, 폭 0.5~1.3㎞로 해변을 따라 기다랗게 펼쳐져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다. 파도에 의해 밀어 올려진 모래가 오랜 세월 바람에 날리며 쌓여 형성된 신비의 모래언덕이다.
바람이 얼굴을 툭 치고 지난다. 이 대단한 '모래성'을 쌓은 그 바람이다. 바람은 1만5000년 동안 해변의 모래를 조금씩 밀어 올렸다.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모래언덕 사이도 걸어본다. 흡사 사막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분위기는 이국적이다. 모래언덕을 넘자 표범장지뱀이 날랜 걸음으로 줄달음치고 개미귀신이 파놓은 모래함정도 지천이다.
바람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또 있다. 바람은 언덕 표면에 고운 모래로 파도 모양의 '그림'을 그려 놓았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원래 억새와 각종 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아카시아 등 외래식물을 다 걷어내니 '짠' 하고 속살이 드러났다. 이게 2년 전의 일이다. 그전에 가봤다면 무성한 억새밭만 봤을 거다. 영화 '마더'에서 처음과 마지막 장면, 도준(원빈 분)의 어머니(김혜자 분)가 덩실덩실 춤을 추던 그 억새밭이 바로 여기였다. 해당화가 활짝 피는 여름날의 운치도 그만이란다.
바라길에 살짝 벗어나 있지만 두웅습지도 가보자.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약 1㎞ 떨어져 있다. 금빛 띠는 금개구리 서식지로 알려진 곳이다. 나무 탐방로가 설치돼 습지 일부를 거닐며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모래언덕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소나무숲길에 든다. 이어 억새가 군락을 이룬 억새골에 도착한다. 낮은 언덕이 마치 제주도 오름과 닮았다.
신두리 해변 북쪽 둑길 끝에서 숲길로 이어진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건너편 해변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모재다. 바닷바람이 고개를 타고 넘으며 솔솔 불어온다. 이제부터 솔잎이 깔린 소나무숲길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곧 모재 전망대가 나온다. 아래쪽에 아담한 몽돌 해변이 시야에 들어온다. 해변으로 내려가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여름이 훌쩍 지난 바닷물은 차갑고 맑다. 동해바다가 짙고 푸르다면 이곳 태안 앞바다는 옅은 푸름이다. 몽돌 위에 앉아 먼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다리쉼을 한다.
다시 숲길을 걷다 마주한 절집이 '능파사'다. 현대적 느낌이 가미된 절 건물이 독특하다. 법당 안으로 보이는 불상의 배치가 이색적이다. 2개의 불상이 등을 맞대고 있다. 하나는 바다 쪽을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을 보고 있다. 바닷가로 내려서면 쉼터가 있고 그 옆에 샘물이 있어 길손의 목을 적셔준다.
파도소리를 길동무 삼아 숲길을 한참 걷는다. 오르막이 끝나고 바닷가 쪽으로 내려선다. '먼동해변'이다. 길지 않은 해안선이 뭍으로 쑥 들어온 덕에 갯바위와 바다로 튀어나온 육지가 사위를 에두른다. 20여년 전 '먼동'이라는 TV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이름이 먼동해변이 됐다. 거북을 닮은 '거북바위'에 나무 한 그루 덩그렇고, 그 너머로 바위섬 하나가 겹쳐진다. 풍경이 참 고즈넉하고 편안하다. '야망의 전설' '불멸의 이순신' 등 이후에도 숱한 드라마에 해변이 등장한다. 해넘이도 아름답다. 태안에는 안면도 꽃지, 운여 등 일몰명소가 여럿이지만 뒤지지 않는 곳이 먼동낙조다.
해변을 벗어나자 바구니에 꼬챙이를 챙겨 갯가로 나서던 어머니들이 반갑게 말을 걸어온다. 굽어진 허리를 부여잡고 갯가로 나서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 한 곳이 짠하다.
먼동해변을 지나 오르막 숲길을 걷다 보면 구례포에 닿는다. 보통 바닷길 트래킹 코스의 경우 해안길을 걷다 포장도로로 빠져나와 다음 길로 가지만 바라길은 곁의 야트막한 산으로 들어간다. 산의 끝에는 또 다른 해변이 기다리고 있어 바라길은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해안 풍광을 즐길 수 있다.
구례포에 들어섰다. 철이 지난 해변은 파도소리만 반겨줄 뿐 관광객을 찾아보기 힘들다. 해변은 혼자 즐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고운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구례포는 갯벌이 없어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썰물 때는 1㎞ 정도까지 물이 빠진다. 구례포 해변 솔숲을 따라 나무 탐방로가 이어진다. 길을 따라 인접한 학암포로 간다. 이제 종착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알록달록 텐트들이 정겹다. 구례포에는 석갱이오토캠핑장을 비롯해 사설로 운영되는 캠핑장이 여럿 있다.
탐방로를 따라가다 해변으로 내려선다.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바닷길을 걷는다. 발가락 사이로 고운 모래가 올라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감촉이 참 좋다. 드디어 학암포다. 학(鶴)이 노닐던 바위(岩)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름다운 바위가 난초와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다.
바닷가로 놀러 온 가족이 학암포를 독차지했다. 아빠와 아들은 갯바위에서 낚시에 푹 빠져있고 엄마와 딸은 조개를 줍는다. 한무리의 바라길 탐방객들이 학암포에서 신두리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태안(충남)=글ㆍ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
◇여행메모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에서 빠져나와 태안으로 들어간다. 태안읍에서 603번 지방도(원북 방향)를 타고 학암포 방면으로 가다 왼쪽 신두리 이정표를 보고 빠지면 된다. 태안읍에서 학암포나 구례포로 가는 버스가 1시간마다 1대꼴로 운행된다.
△먹거리= 원북면 소재지에 있는 원풍식당(041-672-5057)은 박속밀국낙지탕(사진)이 유명하다. 박으로 맛을 낸 국물에 낙지를 살짝 익혀 먹고 수제비나 칼국수를 넣어 걸죽하게 해서 먹는다. 태안군 등기소 부근에 있는 토담집(041-674-4561)은 꽃게장백반과 우럭젓국이 맛난다. 태안읍 안흥식당(041-673-8584)도 빼놓을 수 없다.
△해변길= 1코스 바라길 외에 2코스 소원길(신두리~만리포 22㎞), 3코스 파도길(만리포~파도리 13㎞), 4코스 솔모랫길(몽산포~드르니항 13㎞), 5코스 노을길 (백사장항~꽃지해변 12㎞), 6코스 샛별길(꽃지~바람아래 14㎞), 7코스 바람길(바람아래~영목항 15㎞)다. 코스마다 특유의 매력이 있는 명품 해변길이다.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등을 일부 해변길 구간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1004m의 8코스 천사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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