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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28초

[충무로에서]죽이 되든 밥이 되든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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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논문 지도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내라'는 것이다. "완벽은 완성의 적이다"라는 외국 격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지구상에 가장 훌륭한 논문 한 편 써 보려다가 죽도 밥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럿이 참여하는 공동 연구에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 시간에 일을 마치는 게 무척 중요하다. 누군가 자기가 맡은 일을 끝내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맡은 사람은 아예 시작도 못하게 된다.


그럼 제 시간에 일을 못 마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마감일을 우습게 알기 때문이다. 표현이 과하지만 마감일을 우습게 만드는 데는 일을 알려주는 쪽의 잘못이 크다. 예컨대 학위논문의 이런 저런 내용을 손봐서 좋은 저널에 곧 내자고 지도교수가 다독일 때 '곧'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학생은 논문 투고가 얼마나 오랜 시간과 지적 고통을 요구하는지 과소평가하게 된다. 그러니 저널 논문이 '곧'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연구 프로젝트의 경우 여러 파트에 일을 맡기는 입장에서는 각자 보고서에 '스무 장만 쓰면 된다'고 꼬드기게 된다. 하지만 일을 맡은 조교들은 막상 그 '스무 장'을 쓰려면 무지막지한 데이터 작업과 분석이 필요함을 알게 되고 마감일이 가까워선 밤새도록 일해도 못 마치게 된다. 요컨대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서는 주어진 일이 얼마나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정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래도 지어놔야 죽이든 밥이든 먹을 수 있지만 이왕이면 밥을 만들면 더 좋을 것이다. 죽이랑 밥은 붓는 물의 양이 다르고 조리 시간이랑 불의 세기도 다르므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황에 이르는 것은 조리 온도와 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감일을 못 맞추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일을 마치는 데에도 80대 20 법칙으로 알려진 파레토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계획한 일의 80%를 마치는 데 20%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면 나머지 20%를 마치려면 80%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처음 일을 시작한 속도와 규모로 마감일 언저리의 작업량을 계산하다 보면 커다란 오산을 하게 되고 결국 기한을 넘기게 된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끝도 반, 아니 그 이상인 것이다. (밥 짓는 것도 마찬가지다. 맛있는 밥의 핵심은 마지막 뜸을 제대로 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일을 제때 못 마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이 너무 많아서이다. 처음에 일의 양을 과소평가했더라도 그만큼 시간을 더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밤을 좀 새워서라도 마칠 텐데, 다른 일들 역시 꽉 차 있기 때문에 밤을 새워도 마감일을 못 맞추게 된다.


최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제목의 책을 읽었는데 전직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쓴 (번역판: 타임푸어)이다. 시간 빈곤 현상에 대한 책은 이미 여럿이지만 이 책에 유난히 공감한 이유는 '시간이 모자란' 게 문제가 아니라 '일이 넘치는' 게 문제라는 점을 잘 짚고 있기 때문이다. 시계의 발명으로 노동 시간이 정확히 측정되면서 시급, 주급 등 시간을 기준으로 보상을 받는 사람과 과업의 성격에 따라 고정 급여, 즉 샐러리를 받는 사람으로 작업이 크게 나뉘게 됐다.


전자는 대개 육체노동자로, 정해진 시간보다 더 일하면 초과 수당을 줘야 하니 고용주 입장에서는 일을 많이 시킬수록 비용이 불어난다. 반면 대개가 지식노동자인 후자는 일을 많이 시켜도 고용주에게 비용 부담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두 사람이 필요한 일인데 한 사람이 하며 버티는 구조가 된다.


일한 시간에 따라 보상받는 노동자는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가 생산성의 척도이지만, 과업에 따라 보상받는 노동자는 주어진 일을 얼마나 짧은 시간에 해내는가가 생산성의 척도이다. 따라서 지식의 생산과 가공, 전달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마감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시간을 더 내는 것이 아니라 일을 줄이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일을 줄일 것인가. 그건 나한테도 영원한 숙제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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