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의열단을 조직해 일본 요인 및 친일파 암살과 주요 시설 폭파 작전을 벌였다. 사진=<약산 김원봉 연구>
[아시아경제 온라인이슈팀] 세계 역사상 둘째 수준의 현상금이 걸린 민족주의 독립투쟁가 약산 김원봉. 영화 ‘암살’에서 백범 김구와 함께 작전을 지휘한 김원봉 의열단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의열단은 1920년부터 1926년까지 23차례에 걸쳐 도쿄왕궁과 각급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육군대장 다나카 암살을 시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일본을 두려움에 떨게 한 조직이다.
일제의 김원봉에 대한 두려움은 현상금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현상금은 60만원. 김원봉은 일본제국 역대 최고액인 100만원으로 현재 시세로 320억 가량이다. 이는 오사마 빈라덴(약 540억)이 나타나기 전까지 전 세계 역사상 최고 액수의 현상금이었다.
약산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시절, 메이지 천황의 생일날 동창들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버려 퇴학 조치를 당한 일도 있었다.
약산은 경성 중앙학교에 재학하다 1916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일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1919년에는 만주 신흥무관에 입학해 6개월간 폭탄 제조법을 비롯한 군사교육을 받았다.
약산은 1919년 3ㆍ1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일본을 보고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김원봉은 그 활동에도 불구, 소외되고 말았다. 좌익과 우익 모두 그를 멀리했다. 이후 김원봉은 1947년 3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 인물로 지목돼 구속됐다.
중부경찰서에 구금된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구타와 온갖 고문을 받았다.
이후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해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원봉은 북에서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요직을 지내다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산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여태까지 생소했다가 영화 ‘암살’의 흥행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일제치하에서 장렬한 항일운동으로 역대 최고의 현상금을 받은 인물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최후다.
온라인이슈팀 issu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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