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영업이 중단되고 현금인출이 제한되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현금을 보유하고, 보관에 주의하세요. 관광객 대상 소매치기와 절도에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그리스 주재 한국대사관이 홈페이지에 올린 '교민과 여행객에 대한 당부 말씀'이다. 올 초 연구자료 수집차 그리스에 일주일 넘게 체류한 적이 있는 필자로선 하루 60유로라도 찾으려고 은행 앞에서 몇 십m 줄을 서는 비참한 행렬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가. 감세정책 때문인가. 아니다. 그리스의 부가가치세 세율은 한국(10%)의 두 배도 넘는 23%다.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세율도 각각 26%와 46%로 우리나라(법인세 22%ㆍ소득세 38%)보다 한참 높다. 그리스의 주요 관광지인 섬에 적용하는 부가가치세 30% 감세는 회원국의 사회문화적 성격에 따라 우대세율을 적용할 수 있도록 1992년에 제정된 '유럽연합(EU)의 부가가치세 조화에 관한 지침'에 따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그리스의 조세부담률(2012년 기준)은 23.0%로 한국(20.2%)보다 높다. 사회보장기여금까지 포함한 조세부담률은 33.8.%(한국은 26.8%)에 이른다. 낙수효과를 맹신해 '부자감세'를 편 이명박 정부보다는 현재 그리스 세제가 훨씬 건강하다.
그리스 부자들의 해외 재산도피와 부정부패가 원인이라고? 그런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도 그리 쉽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를 보면 그리스나 한국이나 도긴개긴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영국 조세정의네트워크에 따르면 한국 부자들의 해외도피 자산은 888조원으로 세계 3위다.
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구제금융을 받아 부도위기를 넘기느냐 못하느냐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세금이 마지막 구원투수로 나섰다. 법인세율을 28%로 올리고 섬 휴양지의 부가가치세 면세를 과세로 전환하며 13%로 낮게 적용해 온 음식점 부가가치세율도 23%로 인상하겠다고 한다. 세금을 더 거둘 테니 제발 돈을 빌려달라고 EU 본부에 엎드려 간청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열변을 토했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이런 조국의 꼴을 본다면 뭐라 말씀하실까.
결국 국가의 재정건전성이 문제였다. "국가가 빚을 조절하지 못하면 빚이 국가를 통제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의 지적은 백번 옳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당장 죽여서라도 뱃속의 황금을 꺼내 빚을 갚으라는 채권단의 압력에 그리스 세금제도가 백기사로 나섰다. 세금 더 거두어서 빚을 갚겠다는 것이다. 빚을 진 자는 이렇게 서러운 법이다.
눈을 우리나라로 돌려 박근혜정부의 '공약(公約)가계부' 중 국가 재정건전성 부분을 보면 우려를 넘어 '공약(空約)'에 가깝다. 2017년이면 재정수지가 적자에서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이미 포기한 지 오래됐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대통령의 말은 허언이 되고 마는가. 아니면 시쳇말로 '아몰랑'인가.
세금으로 들어올 돈은 뻔한데 재정지출을 늘리니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난해 국가채무의 이자 지급액만 21조원에 이른다. 이는 봉급생활자 1600만명이 부담하는 근로소득세 전체 금액과 맞먹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통령은 증세는 안 된다고 한다. 답답한 일이다.
국가 재정건전성 유지는 정치의 몫이다. 법률로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는 표에 약하다. "세금은 깎아주고 연금은 올려주겠다"는 공약은 달콤하지만 이를 말 그대로 이행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는 없다. 지키지 못할 빈말보다는 "세금인상 범위 내에서 연금을 올려주겠다"는 솔직한 표현이 옳다. 이는 수입 범위 내에서 지출한다는 '페이 고(pay go)' 원칙과 통한다.
재정건전성 유지는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국방 못지않은 중대한 과제다. 전자는 돈으로, 후자는 무기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병역기피자를 처벌하는 것 못지않게 재정적자를 유발하는 정치인도 엄히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 꼴을 당하지 않는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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