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동네에서 어떻게 알게 됐는지...장례식이 끝나고 동네마트에 갔는데 물건을 멀찌감치 던져주면서 '빨리 가지고 나가라'고 한 경우도 있어요. 지금 상황에선 밖에 나갈 엄두가 도저히 안납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로 인해 가족을 잃은 한 유가족이 심리상담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지난 한 달간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에 감염된 확진자와 이들의 가족, 격리자들은 무서운 감염병의 병원체로 낙인찍혀 하루하루를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3일 의료계에 따르면 메르스 사망자의 유가족은 물론 확진자들과 가족, 격리자 등을 대상으로 심리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메르스 심리위기지원단'이 확진자와 유가족에 대한 상담을 맡고 있고,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신경정신과학회에선 메르스 확진자와 접촉한 격리대상을 마음을 돌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적 재난에 대해 심리치료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세월호 사건 때부터다. 295명의 꽃다운 청춘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되면서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고, 자식을 잃은 부모가 겪을 트라우마를 우려해서다.
하지만 메르스 유가족들은 세월호 유가족보다 더 큰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억울함과 자신도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 전염병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는 자책이 뒤섞여 마음을 더욱 병들게한다는 것이다.
신민영 심리위기지원단장(서울병원 정신건강재활과장)은 "세월호 사건의 경우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동정심리가 많아 지지하는 분위기였지만 메르스 유가족은 자신들이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의 대상"이라며 "사회적 지지도 받지 못하고, 격리된 동안 느꼈던 불안감을 때문에 충격에서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심리지원단이 유가족과 확진자를 심리상담한 결과, 지난 1일 기준 62명 가운데 41% 우울증과 불면을 호소했다. 이들 가운데 19%는 분노를 표출했고, 12명은 생계 불안을 호소했다.
메르스 확진자와 접촉해 사회와 단절된 격리대상도 심리장애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사망율이 40%에 육박하는 신종 감염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격리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도 불안감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격리자들이 '나는 의심환자이고 사람들이 나를 피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다"며 "이런 종류의 불안감은 심리치료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캐나다에선 2003년 급성중증호흡기증후군(SARS)이 유행한 당시 격리대상 2만5000명을 상대로 추적조사한 결과 30% 가량에서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사회적 단절로 인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일상생활 복귀 힘들어질수 있다는 점이다. 장기간 방치할 경우 자살 등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질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심리 상담에선 유가족이나 격리자들의 상황을 공감하고, 이를 지지해주는 것만으로 상당한 치료효과가 있다. 격리자의 경우 메르스를 극복한 사례를 알려줘 안심시키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옳은 일'이라고 격려하는 식이다.
기존에 우울장애 등 정신질환이 있던 격리자들 가운데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오랜 격리생활로 밤낮 구분이 안되는데다,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잠을 못자게 되면서 생활리듬이 깨져 불면증과 우울증이 악순화되는 것이다. 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유도제 등의 약물치료가 이뤄지기도 한다.
한편, 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대책본부는 삼성병원의 간호사 1명이 메르스 확진환자로 최종 확인돼 감염자가 184명으로 늘었다고 이날 밝혔다. 또 7명이 추가로 퇴원해 확진자의 60%가량(109명)이 메르스를 극복했지만, 삼성병원에서 이틀연속 간호사들이 추가 감염되면서 불안한 진정세가 계속됐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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