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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의심이 신뢰를 확인해주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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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의심이 신뢰를 확인해주는 사회 백종민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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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영국 왕세자가 총리와 장관들에게 보낸 27통의 편지가 한 언론사의 정보공개 청구와 10년에 걸친 법정소송 끝에 최근 공개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로드 에번스 기자의 노력은 일명 '블랙 스파이더'라고 불리는 왕세자의 편지를 공개시켰지만 정작 영국 언론계에서는 이 보도에 대해 '김샜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입헌군주제 왕세자의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받게 됐다는 국내 언론들의 예상과 달리 현지 언론과 정치인들의 평가는 다른 모습이다.


공개된 편지의 내용은 한국 기자가 보기엔 김이 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뉴스도 안될 정도이다. 오소리 퇴치 지지, 학생급식 개선에 대한 의견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려웠다.

일간 데일리 메일은 왕세자 측이 법원의 편지 공개 결정에 실망했다고 논평했지만 실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공개돼도 문제될 내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왕세자의 한 측근은 "(편지의 내용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지루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오히려 환경보호론자인 왕세자의 입지만 굳혀준 듯하다.


편지를 받았던 각료들도 왕세자의 '훈수'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모습이다. 노동당 소속의 마가렛 버킷 전 환경부 장관은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검은 거미의 메모로 인해 곤란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그럼에도 편지를 받은 총리와 장관들은 공손한 표현으로 왕세자에게 답장하곤 했다.


지난 4월에는 존 프레스콧 전 영국 부총리가 자신이 받은 왕세자의 편지 2통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한 통은 행사에 그를 초청한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은 그의 모친상을 위로한 것이었다.


그는 선데이 미러지 컬럼을 통해 왕세자가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공개한다고 밝혔다. 그가 공개한 편지들은 이번에 공개된 27통의 편지와는 별도의 것이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이번 공개로 왕세자의 정치적 중립성이 타격을 입지 않았다고 단언할 정도다.


이번 소동을 보면서 언론인의 입장에서 왜 가디언이 이 건에 집착해 왔는지 되새겨 보았다. 공개된 내용대로라면 가디언과 영국 정부가 10년여간 벌인 공방이 무의미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영국 언론은 끈질기게 왕세자의 조그마한 '치부'를 물고 늘어졌고 우려할 만한 문제는 없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날카로운 감시 눈이 만들어낸 의심은 오히려 사려 깊게 행동한 왕세자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했다. 민주주의와 의회, 입헌군주제를 만들어낸 영국의 힘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부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기본적인 합의가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은 다른 곳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최근 영국에 거주 중인 한 지인이 영국 총선 당일 투표소에서 신분증도 없는 유권자가 투표하는 모습을 본 경험을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역대 최고의 초박빙 선거라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누구도 부정 선거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눈에 당연히 낯선 장면이다.


대체 얼마나 오랜 기간 신뢰가 쌓여야 영국과 같은 일이 가능할까. 영국이 마그나 카르타, 즉 대헌장(大憲章)을 통해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것이 1215년 6월15일이다. 올해로 800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각종 리스트가 난무하고 의혹이 넘쳐난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전히 신뢰가 부족하고 믿음을 주지 못한다. 의혹은 어느 순간 진실이 되다 보니 의심이 사라질 수가 없다. 우리도 800년을 기다리면 신뢰가 형성될까.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답답하다.
 






백종민 국제부장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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