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도구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신분이나 개성까지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하며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했고, 나아가 생명을 지키기도, 빼앗기게도 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같이 개인에게 입혀진 옷들이 문화를 이루고 한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최근 '상의원'이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상의원(尙衣院)이란 고려의 장복서(掌服署)를 이어 조선 태조 때 세워진 관청의 하나다. 왕실에서 필요한 옷과 금은보화의 장신구 및 수공예품을 만들어 공급하고 보관하던 곳이었다. 왕실뿐 아니라 왕의 뜻에 따라 종친, 관원, 사신들에게 지급되는 물품을 공급하고 명나라에서 사여 받은 관복을 보수하거나 직접 제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들을 위해 상의원에 소속된 장인의 수가 세종대왕 시절에는 467명, 경국대전 이후에는 597명이었고, 종1품부터 종9품까지의 관원이 관리했다. 참으로 많은 인력이 왕실의 입고 꾸미고 생활하는데 투입됐다는 사실이 조선시대의 경제적 여건으로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상의원이 크게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는 아니지만 가까이에서 왕과 왕의 여인들에게 입히고 꾸미는 일을 하는 곳이었으니, 굳이 상상력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이야깃거리는 풍부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상의원이 사극의 태마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영화 '상의원'은 매우 신선하다.
이야기는 어느 날 왕비와 시종들의 실수로 왕의 면복(冕服)을 불태우면서 시작된다. 면복은 왕의 몇 종류의 옷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법의(法衣)이다. 이 옷은 명나라와 외교관계가 원할할 동안은 명나라로부터 사여 받은 귀한 옷이다. 당시 외교란 주종관계의 외교였으므로 엄격하게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 : 명나라의 황제보다 두 등급 낮은 신하의 옷)을 지켜 보낸 옷이다.
이 영화가 어느 왕 때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정황으로 보아 영조 때라면, 이미 명나라 멸망 이후이므로 어쩔 수 없이 옛 면복을 흉내 내어 만들 수밖에 없었던 시기이다. 그렇게 중요한 옷이 불에 탔으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거기다 극은 이 옷을 다음날 입어야하는 급박한 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다. 30년 동안 왕실의 옷을 지어온 상의원 어침장 마저도 옷을 손보기에는 무리인 상황이다. 하룻밤 만에 옷을 고칠 사람이 필요한 왕비는 궐 밖에서 옷 잘 짓기로 소문난 '바느질꾼'을 궐 안으로 불러들이면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진다. 아름답고 우아한 왕비에게 마음을 빼앗긴 천재 디자이너의 사랑, 엄격한 왕실의 법도, 왕의 질투까지 어우러지며 관객들을 긴장케 한다. 결국 젊은 디자이너의 자유분방함과 예술가로서의 천재적 감성이, 넘보아서는 안 될 짝 사랑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죽음을 맞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불행히도 이 영화가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이 한편의 영화에서 한 벌의 옷이 한 개인의 운명을 바꾸고, 그것들이 모여 복식문화를 만들며, 생명에까지 영향을 주는 역사를 확실히 보고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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