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면 항상 만나는 지인이 있다. 로이터통신에서 30여 년을 재직하고 지금은 은퇴한, 일본에서 존경받는 언론인 마키노 요히지씨다. 한국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졌으며 항상 한일 관계에 대해 염려하는 분이다. 지난 가을 도쿄 프레스센터에서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인터넷 때문에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 언론사에서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신문기사나 사설이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불필요하게 일본인들을 자극하고 있어요." 그의 설명은 이랬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에는 일본의 특파원들을 통해 한국의 기사들이 일본어로 해석, 정리되어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감정적인 단어들이 걸러졌는데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직역된' 한국 기사들이 전달되기 때문에 감정을 정제하고 필터링하는 메커니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한일 양국을 이해하기 때문에 인터넷의 역기능을 더욱 답답해했다.
사실 한국의 신문은 감성적이다. 지난 1월5일 자 모 신문의 사설만 보아도 '악질적인' '악성 바이러스' '시대착오적' 등등의 감정적인 단어들이 서슴없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신문은 이런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 신문의 사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런 사설이나 기사가 인터넷에서 직역되어 일본인에게 전달될 때 그들이 논리적으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특정 사안에 대한 사실관계나 전후 배경지식 없이 갑자기 결론만을 들을 때 느끼는 충격이다.
한일 간의 정서적 차이는 남녀관계에서도 발견된다. 한국의 남성(스토커가 아닌)은 짝사랑하는 여성에게 마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남성적인 저돌성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꽃을 들고 밤새워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때로 한국 여성은 그 정성에 감동해 마음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에서 일본 여성은 기겁을 하고 도망가 버린다. 그녀의 마음에는 감동이 아닌 공포가 엄습한다. 일본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한다. '정말 큰 일낼 남자야. 절대로 만나면 안 돼.' 일본의 여성은 차근차근 시간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을 좋아하지 한국식으로 '남자답게'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데에는 질겁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차이는 논리적으로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냥 다를 뿐이다.
한일 간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그에 맞는 형식이 필요하다. 거두절미하고 몸통만을 감정적으로 전달하면 일본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와 꼬리를 함께 담아 전체를 보여줄 때, 또 일본의 방식으로 차분하게 보여줄 때 일본인들은 납득하고 비로소 공감한다.
물론 일본인들도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한 바 있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하기 직전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영어로 '노 코멘트(논평하지 않음)'라는 의미의 단어를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어로 발표한 단어는 '모쿠사츠', 우리말로 해석하면 '묵살'이었다. 분개한 연합국은 더 이상의 협상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 직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다.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고 습득하는 데에는 최적의 매체이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몇 시에 도착하는지에 대해 인터넷은 가장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차가운 정보의 이면에 숨은 해석이나 인간의 의도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왜 그 사람은 그런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해석이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은 철저하게 기계나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우리도 이제 '멍청한 신'의 본질을 자각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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