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갇힌 오지선다…생각에 따라 정답 다를 수 있어 "어린 학생들 창의성 가로막아" 지적
[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 한 초등학교의 '난감한' 국어시험이 어린아이를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학기말 국어시험으로 추측되는 이 시험지는 오지선다로 정답을 유도하는 틀에 갇혀 어린 학생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막는다는 지적을 사고 있다.
한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틀린 문항의 사례를 블로그에 올려 알려지게 된 이 문제들 중 하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떠올려 글로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아닌 것'을 고르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있었던 일인지 생각한다' '함께 있었던 사람과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떠올려 본다' '사람들이 한 말은 큰따옴표를 사용하여 나타낸다' 등이 선택지로 제시됐고, 정답은 '나의 생각이나 느낌은 멋지게 지어낸다'이다.
문항의 의도는 '멋지게 지어내는 일'은 글을 객관적으로 쓰는 데 맞지 않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구체적 상황을 주지도 않고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쓸 때 '멋지게'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느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력을 입히면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시험지를 올린 학부모는 "자신이 겪은 일을 떠올려 글을 쓸 때 (생각에) 살을 붙이고, 상상을 하면서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이런 시험문제로 아이들의 생각에 자질구레한 틀을 들이 대면 글을 쓰고자 하는 동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밖에 '겪은 일을 글로 쓰고 제목을 정하는 방법으로 알맞은 것'을 고르는 문제의 정답은 '글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도록 정한다'인데, 나머지 선택지도 어린 학생들이 자유롭게 제목을 정하는 데 있어 왜 문제가 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온점을 꼭 찍는다' '한 문장으로 정한다' '글쓴이의 이름을 넣어 정한다' 등의 선택지는 오답 처리됐다.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경우로 알맞지 않은 때'를 고르는 문제도 논란이다. 정답이 '처음 만난 사람을 내 친구에게 소개할 때'인 이 문제의 출제 의도는 '아는' 사람이라는 점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처음 만나도 얘기를 많이 들어 꽤 알게 된 사람일 수도 있고, 처음 만났으나 짧은 시간에도 잘 알게 돼 충분히 소개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지적에 학부모들은 대체로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초등학교 1·2학년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이 같은 유형의 문제 때문에 자녀를 이해시키기 난감했던 적이 많았다고 토로한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한 학부모는 "문제가 원하는 답을 맞히려면 예습이 필요하다"며 "답지를 보고 설명해줘야 할 정도로 어른들도 출제자의 의도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평가'가 불가피한 교육 체제 안에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이 시험이라는 것 또한 배워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에 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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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항의 잘잘못을 떠나, 초등학교 저학년에게까지 지필평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인천에 거주하는 한 학부모는 "창의력을 키워주겠다고 교과과정을 바꿔놓고 시험은 아직도 기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학교가 많다"며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주관식 문항만으로 평가하는데, 문제를 읽지 않은 엉뚱한 답이 아니라면 교사가 모두 만점을 주는 걸 보고 1학년에 적절한 평가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초등학교의 경우 학교 전체가 일시에 보는 지필평가는 사실상 폐지됐으나 단원평가나 월말평가 등의 이름으로 반별로 시험이 자율적으로 치러지기도 한다. 시험성적이 학교생활기록부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엄연한 '평가'로 인식돼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오정희 서울 상현초등학교 교사는 "교과서의 경우에도 간혹 주관식 문제를 내놓고 책 뒤에 '정답'으로 제시된 몇 가지 답안을 오려 붙이도록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차라리 답지를 무시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유도한다"며 "1·2학년에게 지필평가보다는 생각을 다양하게 열어주는 수행평가 방식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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