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2007년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이 영화가 받은 부문 중에서 ‘남우조연상’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안톤 시거 역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은, 조연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극 속의 비중도 그렇지만, 영화가 품고 있는 문제를 시종일관 끌고가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악(惡)’의 문제와 ‘법(法)’의 문제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
우선 왜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일까.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생뚱맞은 제목이다. 형제 감독인 에단 코엔과 조엘 코엔에게 물어봤더니, 그 질문은 소설 원작자인 코맥 맥카시에게 던져야할 질문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영화에서 노인으로 나오는 사람은 보안관인 에드(토미 리 존스)이다.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공권력인 ‘에드’는 그러나 무기력하다. 은퇴를 앞둔 나이, 옛날 생각만 하는 나이이다. No country for old man. 에드가 사는 나라는 노인들이 살기에 적당한 나라는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Old man and sea)’를 떠올린다. 노인이 광대한 세상의 주연이었던 시대를 말이다. 노인이 존중받고 역할을 하던 시대는, 노인의 지혜와 끈기가 세상살이에 소용이 있었던 시대였다. 노인은 85일간 성난 대양에서 당당히 죽음과 맞서 싸우며 거대한 물고기를 잡아온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아직도 노인은 법 집행의 상징인 보안관을 맡고 있지만, 그는 피라미 한 마리도 제대로 못건져 올린다. 왜 그런가.
안톤 시거는 스릴러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비정한 살인자이다. 사람을 죽이는 침착함은 놀랄 만하지만 그의 악마적 카리스마는 거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살인을 하면서 어떤 감정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기계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살인은 그에게 하나의 선택일 뿐이며, 동전의 양면 중에서 고르는 선택 따위처럼 이유없이 쥐는 운명일 뿐이다. 그는 이전의 살인마처럼 히스테리나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담담하고 고요하다. 그는 흥분하지도 뽐내지도 않는다. 촌스런 가리마 아래 퀭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음산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나한테 꼭 이럴 필요 없잖아요? 사람들은 꼭 이런 말을 하더군." 이렇게 말이다. 그의 냉소와 힐난을 보면, 모든 것을 꿰뚫는 '살인철학자'같다. 이런 인물 앞에, 노인의 나라를 지탱해온 인성의 내면인 양심과 인성의 외면인 ‘법’은, 의미가 없다. 영화에서 안톤 시거가 강력한 이유는, 어떤 동요도 반성도 없는, 악(惡)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나온 악이 아니라, 인간 바깥에서 어떤 악마가 개입한 듯한 순수악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슈퍼에고라는 개념을 말했지만, 공자는 인의(仁義)를 말했다. 인간이 마을을 만들고 사회를 이루어 살면서, 서로의 관계를 정립하는 방식으로 ‘강력한 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법’이 아무리 강력해도, 인간은 늘 법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공자가 그것을 통찰하고, 외부의 규범인 법 외에, 인간의 내부에 ‘법’을 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仁)은 자기를 규제하는 내부 법이며, 의(義)는 타인과의 관계를 규제하는 내부 법이다. 이것이 인간 본성의 3층(지하1층이 딸린 2층)집에서 맨 꼭대기층이라고 말한 것이 프로이트였다. 안톤 시거는 내부에 ‘자신 만의 독창적인 법’이 들어와 있다. 그것이 행위를 만들고 범죄를 생산한다. 아무도 그의 내면을 짐작하지 못하며, 가공할 악은 제어되지 않은 채 활보한다.
안톤 시거가 지하실의 이드(id)라면, 모스(조쉬 브롤린)는 1층에 거주하는 보통의 ‘욕망인간’이다.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마약거래의 현장을 만난다.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 듯 도처에 죽은 사람들 밖에 없다. 차 안에서 한 사람이 신음하고 있었는데, 그는 죽어가며 물을 원한다. 그는 “물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먼 곳 나무 아래에 서있는 차 한 대를 발견하고 다가가는데 거기도 사람이 죽어있다. 차에는 돈가방이 하나 있다. 모스는 돈과 총들을 챙겨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모스가 이 사건에 끼어든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돈가방을 본 순간 그는 ‘범죄’에 충동적으로 가담한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모스는 집으로 돌아가 가방을 깊이 숨겨놓은 뒤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죽어가며 물을 요구하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물을 들고 다시 범죄 현장으로 간다. 이 ‘양심’ 또한 인간의 마음 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다. 공자는 집어넣으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은 잠깐씩 빼놓고 다른 욕심을 채우고 싶어했던 그 ‘물건’이다. 죽은 자들 밖에 보이지 않는 삭막한 텍사스 사막은 인간의 황폐한 내면을 펼쳐놓은 듯 하다.
이 현장에서 모스는 시거에게 들키고, 추격전은 시작된다. 공병 출신이며 용접 전문가인 시거는 ‘보통 사람’답지 않게 대담하고 치밀하게 도주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심장을 지닌 사람이기에, 기계적 집행자인 시거를 피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교가 가능하겠지만, 모스가 부상당했을 때와 시거가 부상당했을 때의 행동을 비교해보면 극명하다. 모스는 병원을 이용하지만, 시거는 스스로 치료한다. 모스는 세상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며, 시거는 자가 치료 기능까지 지닌 ‘비정한 기계’이다. 두 사람이 가장 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모텔의 양쪽 방에서 대치하는 장면이다. 전파 경보장치를 따라온 시거를, 극적으로 따돌리는 모스를 보면서 관객들은 아직까지 ‘인간의 지혜’가 우월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거는 자기를 처치하기 위해 범죄집단에서 고용한 칼슨(우디 해리슨)을 죽이고, 도망쳐 숨어있는 모스까지 죽인다. 감독은 영화에서, 시거가 모스를 추적하여 죽이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경찰들이 사후 처리하듯 이미 죽어버린 모스를 보여줄 뿐이다. 두 사람의 추격전에만 공력을 들이는 영화였다면 이렇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제 다시 노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보안관 에드는 모스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전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스의 아내까지 죽임을 당할 때까지 속수무책이다. 모스가 죽은 현장에 에드가 다시 들어갔을 때, 시거가 거기 있었지만 그는 노인보안관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 늙은 ‘법 집행자’가 그에게 무해하기 때문이다. 모스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꿈 이야기를 하고, 옛날 죽은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 가공할 범죄자의 뒤를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범죄와 법이 팽팽하게 대치할 수 있던, 혹은 범죄와 법이 일정하게 소통이 가능하던 시대가 지나버렸다는 자각증세가, 이 영화에는 서성거린다. 모스를 보면서 법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셈일까. “자기 것이 아닌 돈가방을 욕심냈으니 죽어도 싸지.” 범죄는 젊어지고 법은 늙고 무능해졌다. 그 중간계에서 욕망과 충동들이 일어났다가 피얼룩으로 주저앉는다. 영화는 끝났지만, 시거는 다시 산소통을 들고 떠난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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