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푸른 어둠과 안개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놀랍고 그윽한 영화. 다 본뒤에,눈을 감고 이 슬픔 속의 애잔한 희망과 덧없음을 가슴속에 담았다. 안개속의 풍경(LANDSCAPE IN THE MIST)은 그리스가 자랑하는 예술영화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1988년 작품이다.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등 5개부문을 휩쓸었고 유럽영화제에서도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갈채를 받았던 영화라고 한다.
이 영화는 두 오누이, 불라(타니아 파레올로구)라는 12살 소녀와 알렉산더(마칼리스 제케)라는 5살 꼬마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기차를 타고 독일을 향해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런 줄거리는 사실상 그저 걸친 플롯일 뿐,이 영화는 황량하고 고적한 그리스의 풍경들을 끝없이 비춰준다. 안개 자욱한 길. 어둠. 지나가는 차들. 황량한 거리. 무표정한 사람들.굳은 사람들. 싸늘한 계절의 표정까지 카메라는 집요한 인내심을 가지고 따라다닌다. 그 풍경속에 이 작은 아이들은 희망없어 보이는 오딧세이를 계속하고 있지만, 실은 이 아이들이 그 메마른 풍경을 완성하는 듯이 보인다.그들의 내면속에 한없이 슬픈 고독과 불안의 안개를 피워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에 들어차있는 길과 사람과 차들과 나무의 풍경들은, 헐리웃이 즐기는,생략이 보이지 않는다. 긴박한 카메라워크도 없다. 느린 동작의 사람들,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들 마저도, 끈질기게 추적한다.붙박이처럼 카메라가 서있다. 느릿느릿한 거리배회나, 절망의 동작들을 한 순간도 잘라내지 않고 따라다닌다. 앙겔로풀로스는 이같은 촬영방법을 "죽은 시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린 정지된 어떤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으로써,놓치고 있었던, 미묘한 마음의 울림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되돌려받는다. 안개속의 풍경은 신이 바라보고 있는 고즈넉한 시선같아 보인다. 세상사의 자잘한 일들이, 무심의 신성으로 바라본 눈길엔, 아마 이런 푸르고 흐릿한 풍경으로 잡히리라.
안개속의 풍경들은 필연이 없다. 그저 우연히 돌린 눈길에 잡힌 그림들일 뿐이다. 5살짜리 꼬마가 젖먹던 힘을 다해 도망치는 모습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도둑"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도 그런 동심의 우수와 불안이 전편에 가득하다. 이 영화는 말이 없다. 그저 보여주는 것들로 말한다. 대사가 별로 없다.그 침묵이 안개속에 서성거리는 그림자들처럼 느릿느릿 보는 사람의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아버지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는 것도 막연하기 짝이 없다. 그저 독일로만 가면 그가 있을 거라는 생각 뿐이다.독일에 산다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냥 듣기좋은 말로 꾸며낸 얘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없다. 그렇다면 남매의 이 여행은 고난으로 가득차 있고,위험과 굶주림으로 가득차 있는 여행은, 결국 목적이 비어있는 무상한 방황일 뿐이다. 이 푸른 안개속의 길들은, 바로 삶의 은유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영화는 처음과 끝이 정교한 계산위에 묶여져있다. 어두운 방안에서 소근거리는 두 아이는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는 성서의 귀절을 읊조린다. 그리고 세상의 어둠을 뚫고, 그리스의 안개를 가로질러, 독일을 향해 떠난다. 천신만고끝에 다다른 독일의 어느 큰나무 아래서, 아이들은 다시 속삭인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고. 그들이 찾은 빛이란,사실 관객이라는 어른들의 눈엔,아직 해결되지 않은 삶의 고난의 다른 단계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빛이다. 어둠속에서 빛을 꿈꾸는 행위는 그 아이들의 길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여로이다.우린 그걸 되짚어 걸어간다.
이 영화는 어떤 유년을 떠올리게 한다. 발이 부르트도록 한없이 걸었던 겨울밤의 무서움과 고독을 회억시켜준다. 늘 어떤 길에서 비척대고 있었던, 마디마디의 삶들로 데려가준다. 난 어떤 아버지를 찾아 그길을 헤매고 있었던가? 그 길은 내 생의 수많은 시행착오였거나,또 새로운 사유의 시작이었다.그런 이유에서 안개속의 풍경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나를 찍어낸다.
몇가지 인상깊었던 장면들을 적어보면, 소녀 불라가 트럭뒷칸에서 40대쯤 된 아저씨에게서 강간을 당하는 장면. 어슴프레한 새벽. 트럭기사는 갑자기 황망한 욕정이 불붙었는지 불라를 앞자리에서 끌어내, 뒷칸으로 데려간다.도망치며 반항하는 불라. 하지만 소용이 없다. 포장이 내려쳐진 뒷칸으로 끌려들어간 뒤, 카메라는 안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반항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약 5분동안(?) 그 뒷칸의 포장만을 비춘다. 트럭 옆으로는 차들이 달려지나가거나 섰다가 다시 간다. 우린 그 숨막히는 침묵과, 황량한 길위에서, 그 소녀의 비명과 고통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눈으로 확인되는 고통보다 더욱 아픔으로 전달되어온다."보여주지 않기"는 때로 "보여주기"보다 훨씬 강렬하다.
또하나, 불라는 오라스테스라는 한 청년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는 유랑극단의 보조요원이다. 어느 술집에서 불라는, 그가 남자들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동성애자임을 본다. 자기에 대한 관심은 그저 동정이었을 뿐이다. 불라는 또다른 상처를 받고 그 술집을 뛰어나간다. 오라스테스가 뒤늦게 오토바이를 타고 따라왔을 때,그녀는 외면한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는 괴로움같은 감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그리고 마구 흐느낀다. 그때 오라스테스는 말한다. "처음엔 다 그런거야. 심장은 부서질듯 두근거리고..." 이 작은 소녀의 가슴속에 첫사랑은 그렇게 왔고, 그녀가 이내 등돌리고 그를 영원히 떠남으로써 끝이 난다.
그리고. 불라가 독일가는 기차비를 구하기 위해, 새벽 어느역에서 어떤 사내에게 매춘을 시도하는 장면.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라고 말한다. 그 말은, 우리말로 하자면 35000원 따위의 금액이겠는데 어떤 단위였는지 잊어버렸다. 그녀의 이말에 사내의 표정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당황의 표정으로 바뀌다가 다시 초조해하면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는 묻는다.몇살이지? 혹은 이름이 뭐지? 대꾸는 없다. 내가 괜한 것을 물었군. 사내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사내는 기차가 서있는 뒷편으로 간다. 한참후에 불라가 따라간다. 사내는 담배를 피며 안절부절한다. 그러다가... 그는 서있는 기차의 튀어나온 쇠부분에, 돈을 놓고는 쫓기듯 사라진다. 그가 사라지자 불라는 그돈을 집어들고,황급하게 그녀의 동생에게로 달려간다. 이 장면. 막막한 침묵속에 관객을 미묘한 슬픔과 충동속에 뒤엉켜버리게 한다. 끓어오르는 느낌의 응어리같은 것을 삼키려 공연히 메마른 헛기침을 하게한다.
거기,그 슬픈 그리스의 어느 역사(驛舍)에 나도 유령처럼 서있었다. 앙겔로풀로스는 이런 자작시를 남겼다고 한다. "밤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언제 새로운 날은 밝아올것인가?" 우린 어둠속에서, 과연 날마다 이런 꿈을 꾼다. 그 꿈속에 안개속의 풍경은, 언제나 현재형이며,희망은 유령처럼 안개 저편에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을 뿐이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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