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의 아물지 않은 상처의 아픔을 어림했을 것이다. 1995년,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피로 물든 역사를 말해준다. 1707년의 통합 이후 300년 이상의 세월에도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역사는 잉글랜드의 손을 들어줬지만, 통합 당시 스코틀랜드의 문화수준은 잉글랜드 보다 높았던 것 같다. 잉글랜드에는 대학이 고작 2개였으나 스코틀랜드에는 5개였고, 아담 스미스(국부론 저자), 데이비드 흄(영국을 대표하는 철학가), 제임스 맥스웰(물리학자) 등도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다.
의복 문화도 그렇다. 영국의 전통의상이라 하면 잉글랜드의 옷이 아닌 스코틀랜드의 타아탄 킬트(tartan kilt)를 떠올린다. 타아탄이란 바둑판모양(체크)의 무늬, 또는 그 무늬가 있는 직물이다. 이것은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 된 것으로 보이나, 스코틀랜드에 건너와서 씨족의 심볼로 발전하며 애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따뜻하고 사용하기 쉬운 한 장의 모직천이 고산지대에 사는 스코틀랜드인의 최적 민속복이 된 것이다. 킬트 역시 대표적인 스코틀랜드의 민속복이다. 타아탄 무늬가 있는, 둘러 입는 스커트(wrap skirt)로 남성들의 옷이다.
타아탄체크를 이루고 있는 색선은 각각의 가풍에 따라 색을 달리하면서, 가문을 빛내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한줄 두줄 색상이 더해져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색을 넣은 색실들로 한줄한줄 부족들의 역사를 짜 넣어 가며, 씨족의 타아탄, 왕가의 타아탄, 영주의 타아탄, 지역의 타아탄, 헌팅 타아탄 등 여러 종류가 만들어졌다.
타아탄 체크가 스코틀랜드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3세기경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민족의상이 되어 씨족의 타아탄은 물론 무도회용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착용되었다. 더욱이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지면서 타아탄은 잉글랜드에까지 널리 퍼진다. 그러나 1745년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의 부활을 두려워하여, 스코틀랜드 씨족의 단결과 통합의 상징이었던 타아탄의 사용금지령을 내린다.
이 금지령은 씨족들의 세력을 빼앗기 위해 시행되었으므로, 위반하면 엄벌에 처해졌다. 이 같은 탄압이 집요하게 반복됨에 따라 차츰 단결력도 느슨해지고, 새로운 의복에도 익숙해져갔다. 따라서 타아탄의 기술력은 점차 소멸되어 재현이 어려운 지경까지 되었다. 다행히 1842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1882년 죠지 4세(George IV)가 스코틀랜드 씨족의 족장들에게 타아탄 착용을 권장하면서, 타아탄은 빠른 속도로 부활한다. 우수한 전통문화가 말살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이후 타아탄은 거대한 영국을 등에 업고 비약적 발전을 거두며, 오늘날 세계인이 애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는 스코틀랜드의 복식문화가 영국이라는 큰 틀 안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옷을 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이 45%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요구도 지혜롭게 풀어서, 계속적으로 복식 문화 향상에 기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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