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중에 '생때같다'라는 말이 있다. 맥락으로 대강 짐작컨대 아깝게도 죽었지만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다는 의미이다. 어원을 종잡기 어려워, 국립국어원도 두 손을 들었다는 그 낱말이다. '생때'라는 말이 명사로 따로 쓰이지는 않고, '생때같다'라는 형용사로만 쓰인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는 "죽기는 왜 죽어. 생때같이 살아만 있단다"라는 표현이 있고, 박경리의 <토지>에는 "생때같은 외아들이 감옥에서 죽어나온 뒤"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박완서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생때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라는 문장이 있기도 하다.
생때같다는 말은, 죽은 상태와 관련지어 쓰는 말인지라, 생때의 '생'이 '살아있는(生)'의 의미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나, 뒤의 '때'라는 말에서 해석이 막히고 만다. 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린 자식의 죽음에 자주 쓰는지라 '때'가 싱싱한 생명의 무엇을 가리킬 것만 같은데, 그럴 만한 뉘앙스가 붙들리지 않는 게 문제이다. 풀어낼 수가 없는 말, 들여다볼 수가 없는 말,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말, 그래서 답답하고 찜찜한 말이 바로 '생때같은'이다.
세월호의 비극 이후에, 많은 사람이 자주 쓰지 않던 이 말을 입에 되올렸다. 그야말로 생때같은 자식들이 한 순간에 너무도 허무하게 고통스럽게 떠나갔기에, 이 형용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싱싱하고 파릇파릇하고 귀하고 눈부시던 아이들의 주검을 껴안고 우는 부모와 가족들, 혹은 그 주검조차 바다 한 귀퉁이에 둔 채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는 이들. 그들의 꿈속에 생때같이 살아있는 보물들이 오늘도 출렁거려 그저 몸부림치기만 해온 4월이 벌써 끝자락에 매달렸다.
생떼(어거지로 쓰는 떼)라는 말과 헷갈리지 말 것. 참척 앞에 몸부림치는 그 본능적 절규와, 얄팍한 속셈이나 깊숙한 야심으로 함부로 내지르는 행동이 아 다르고 어 다른 차이니, 마음이 세심해지지 않으면 진정성을 읽어내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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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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