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 애견골목 가는 길에, 행인이 다가가도 날개를 펴지 않는 비둘기를 보았다. 날개를 펴기는 커녕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거리에 흘려놓은 인간의 찌꺼기들을 수색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에게도 생활이 있을 것이며, 삶에서 얻은 통찰이 있을 것이다. 굳이 벌레나 열매 따위를 어렵사리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먹이가 널려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알 것이고, 제 종족을 잡아먹거나 공격하려고 드는 인간이 없다는 것도 파악했을 것이다. 인간의 무관심과 무심이야 말로 안전한 숲인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거의 날 필요가 없기에, 닭처럼 워킹만 하느라 허벅지가 굵어진 비둘기를 우린 닭둘기라 부르지만, 사실 닭에 대한 폄하도 비둘기에 대한 조롱도 우스운 것이다. 비둘기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교과서처럼 내밀기에는 인간이 너무 면목이 없다. 변화한 생존의 환경이 만들어낸 생의 진화일 뿐이며, 그 환경은 대개 우리가 이룩하거나 가담하여 이룬 것이다.
비둘기를 상징으로 쓰는 정당을 만들었던 DJ시절만 해도 그것은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싣고, 기념식 때마다 하늘로 날아오르곤 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문명세상이 비둘기의 보금자리를 어떻게 파괴해가는가, 그 속에서도 이 선하고 강한 날짐승이 어떻게 죽지를 서로 부비며 견뎌나가는가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어느 시절부터 비둘기는 인간에게 혐오감을 주고 질병을 옮기는 새, 나쁘거나 더럽거나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을 잡아먹는 굶주린 맹수는 아니지만,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기도 하는 인간과 그래도 동거해야 하는, 비둘기들 또한 고민이 많을 것이다. 다행히도 굳이 혐오를 행위로 옮겨 살육이나 퇴치행위 따위를 일삼지 않는, 인간의 무심에 기대어 기식(寄食)을 해나간다.
부두노동자 사이의 권력과 갈등을 그린 영화 '워터프론트'에는 옥상마다 비둘기를 키우는 풍경이 나온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물망 속에 비둘기를 가둬놓고 모이를 주면서 삶의 위안을 받는다. "비둘기 먹이 주러 옥상을 올라와." 이것이 한 사람을 살인하기 위한 음모의 멘트였다. 천진한 비둘기와 탐욕스럽고 잔혹한 인간의 대비를 노렸을 것이다. 고려가요인 '유구곡(維鳩曲)'은 '비두로기'라고도 불리는 노래이다. '유구곡'의 의미는 '오직 비둘기뿐이라는 노래'이거나 '비둘기에 대한 노래'이다. 예종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직언해주는 간관(諫官)이 없는 것을 개탄해서 지은 노래라고도 한다. 제목은 비둘기지만 내용은 뻐꾸기(伐谷鳥를 예찬한다. 비둘기도 비둘기도 울음이야 울지만, 난 뻐꾸기가 좋아 뻐꾸기가 좋아. 비둘기와 뻐꾸기는 모두 울음을 울지만 어떤 울음은 듣기 싫고 어떤 울음은 듣기가 좋다는 점을 비교한 것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할 때 어떻게 거슬리지 않게 해야 하느냐의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좋다는 얘기를, 새를 비유로 표현한 옛노래이다.
비두로기는 비다라기, 비달기, 비다리, 비다라, 비닭이 따위로도 쓰였다. '닭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비닭(非닭)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날아다니는 닭(飛닭)'을 의미했을 가능성도 있다. 빛닭이 어원으로 '빛이 나는 닭'을 의미했다는 설도 있다. 닭과 비슷하지만 닭이 아니라는 어원과 날아다니는 닭이라는 의미는, 다시 주저앉아 닭둘기가 된 퇴계로 거리의 비둘기를 정확하게 포지셔닝해준다. 아침에 문득 이육사의 시 '소공원'을 읽다가 그 속에서 비둘기를 발견한다.
한낮 햇발이
백공작 꼬리 우에 함북 퍼지고
그 너머 비닭이 보리밭에 두고온
사랑이 그립다고 근심스레 코고을며
이 대목이다. 육사는 비둘기를 '비닭' 혹은 '비닭이'라고 쓰고 있다. 비둘기 우는 소리를 들으며, 보리밭에 두고온 사랑이 그립다고 근심스레 코를 곤다고, 사랑스럽게 적고 있다. 비둘기의 은밀한 사랑에 대해 저렇게 감정이입이 되던 시절을, 우리는 얼마나 멀리 지나와 버렸는가. 구구구구. 오래된 사랑의 메신저였던 저 새는, 이제 퇴계 거리의 아침거지가 되어 어기적어기적 굵은 허벅지를 들어 옮긴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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