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올해 3월 랜드 폴 미국 상원의원은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CIA) 국장 지명자 인준 표결에 앞서 토론자로 연단에 올라섰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발언을 이어가겠다"며 시작된 폴 상원의원의 연설은 한밤까지 약 13시간 동안 지속됐다. 저녁이 되자 초췌해져가는 그를 위해 동료 의원들은 장시간 질문을 하는 등 지원에 나섰다. 인준안 통과는 이미 여야가 합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폴 상원의원은 자신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발언)'로 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CIA 중심의 드론(무인기) 공격의 문제점을 미국 사회에 환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름을 달리하지만 우리에게도 '무제한 토론'이 있다. 국회법 106조2에 근거한 무제한 토론은 의원의 3분이 1이 서명한 요구서를 본회의 시작 전에 의장에게 제출해 승인을 받으면 의원 1명당 1회에 걸쳐 토론을 할 수 있으며 더 이상 할 사람이 없을 때까지 토론이 지속되는 제도다.
28일 우리 국회에서 무제한 토론이 벌어질 뻔 했다. 민주당 의원 127명이 황찬현 감사원장 임명동의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강창희 국회의장은 "인사 관련 안건은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국회의 오랜 관행"이라며 수용을 거부했다.
무제한 토론이 실제 성사됐다면 어땠을까. 무제한 토론을 단순히 의사진행 방해수단이 아니라 정치적 난국을 푸는 논의의 장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는 여전히 우리 정치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감사원장 임명은 지연됐을지 몰라도 난국에 빠진 정치를 여야가 토론을 통해 실타래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가능성은 상상에 그쳤다. '무제한 토론'이라고 쓰고 '필리버스터'라고 읽는 현실 때문이다. 생산적인 정치 논의 창구로 만들지 못한 정치풍토에 아쉬움이 남았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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