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관 선생의 황토집을 다녀온 후 며칠이 흘러갔다.
마을도, 화실도 처음 하림이 이곳에 왔을 때처럼 조용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사촌언니를 따라 병원으로 간 소연이 소식이 궁금하긴 했지만 하림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배문자로부터 받은 만화대본 작업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패망한 모헨조다로의 눈 먼 여자 가수는 철기문화의 사악한 왕의 후처가 되어 오로지 현금(玄琴) 위에 자신의 운명과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눈물로 노래한다. 그런데 왜 그럴까. 수관 선생의 농담처럼 그 눈 먼 여가수의 얼굴 위에 자꾸만 소연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그리고 귀 밑 아래 희미한 지워질 수 없는 푸르고 커다란 점이 떠올랐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슬픔은 하나의 강이 되어 흐르기 때문일까.
모헨조다로를 점령한 검은 원숭이 형상의 철기시대 왕은 먼저 절대왕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피에 물든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고, 그 탄압을 위해 사납고 충성스럽고 무시무시한 세 마리의 개를 길렀다. 그 세 마리 개의 이름은 군견(軍犬)과 검견(檢犬), 그리고 언견(言犬)이었다.
군견은 군대였다. 단순하지만 충성스러운 군대는 절대 권력의 최대의 방패이자 무기였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독재자는 사병처럼 길들여진 군대가 없이는 한시도 버틸 수가 없다. 두 번째 검견은 비밀경찰을 포함한 법의 집행자들이다. 무시무시한 고문도구를 갖추고 반대자들을 어김없이 찾아내 지하감옥에 보내거나 십자가에 매다는 그들은 절대 권력 그 자체이기도 했다. 전제시대의 혹리(酷吏)들이 바로 그 같은 사나운 개였다.
그리고 또 하나, 언견은 바로 언론이다. 말을 휘두르고 말을 잡는 자가 천하를 지배하게 된다. 혹세무민,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우기도록 하고, 없던 말도 만들어내어 사정없이 물어뜯고, 무시무시한 말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겁박하는 그들이 없다면 불순한 자들이 언제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먼저 삐딱한 학자 무리들을 구덩이에 묻고 책을 불태워버리도록 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 사납기 짝이 없는 충성스럽게 길들여진 세 마리 개들은 자기가 죽고 나서도 이빨을 드러내고 반대자들의 목줄을 노릴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재자들은 죽어도, 시대는 바뀌어도 독재자들이 길러놓은 개들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오랫동안 위세를 잃지 않고 호시탐탐 다시 살아날 기회를 엿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재자 마르코스는 죽고 무바라크는 감옥으로 갔지만 그의 졸개들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필리핀이나 이집트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독재의 추억은 병처럼 깊고 유혹적이다.
모헨조다로의 눈 먼 여가수는 노래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를.... 사라진 고향과 순한 세상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를....
하지만 수관 선생이 말했던 순한 세상.... 과연 그런 세상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그 순한 꿈은 어쩌면 꿈의 세계, 예술의 세계에서만 가능할 지 모른다. 힘없고 상처 많은 가수의 노래만이 상처받고 찢겨진 이 사나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꽃이 아니라 풀꽃 말이야.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를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뀌는 것인지도 몰라. 슬픔이 없는 분노는 남을 태우고 자기까지 태워버리지. 그리고 깊은 상처만 남기지.’
동희형의 말처럼, 자식 잃은 어머니 같은 슬픔으로 가득찬 가수의 노래만이 저 성난 짐승들의 마음을 달래고, 다시 모헨조다로의 순박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세상....
요(堯)와 순(舜)이 실천했고, 공자(孔子)가 꿈꾸었고, 석가모니가 보여주었고, 예수가 하늘나라가 칭했던, 바로 그것. 군견(軍犬)도, 겸견(檢犬)도, 언견(言犬)도 필요없는 그런 나라일 것이었다.
하림은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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