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미국이 지난 18일 양적완화 축소를 보류하면서 신흥시장 통화가치는 하락을 멈추고 반등했지만 유독 인도네시아의 루피아만 죽을 쑤고 있다.
높은 인플레이션, 낮은 성장률, 확대되는 경상수지적자, 유권자 환심만 사는 정치권이 근인(根因)으로 꼽히고 있다.
29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루피아는 27일에도 하락세를 멈추지 않았다. 달러당 1만1506 루피아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양적완화 축소 보류 결정 이후에도 0.6% 평가절하됐다. 올해 들어 루피아 가치는 달러화에 대해 16% 이상 떨어졌다.
반면, 함께 약세 행진을 해온 인도의 루피 가치는 미국 달러에 대해 1.5% 상승하는 등 다른 신흥국 통화들은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4년 사이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루피아는 수출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무역수지 흑자와 경상수지 흑자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지금은 악영향만 낳고 있다.
우선, 물가가 급등했다. 8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8.79%로 2009년 1월 이후 가장 높았다.
반면, 성장률은 2분기에 5.8%로 3년 사이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국의 성장둔화에 따른 원자재 수요 둔화가 성장의 발목을 잡은 직접 원인으로 꼽힌다.
올해 연간 성장률도 2009년 이후 처음으로 6%를 밑돌 것이라는 관측이 나와 있다.
루피아 가치 유지와 물가 억제를 위해 중앙은행인 방크 인도네시아는 6월 기준금리를 7.25%로 무려 1.5%포인트 인상하고 외환시장에 개입해 공격적으로 달러를 팔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채 외환보유고만 축냈다. 인도네시아의 외환보유고는 7월 말 기준으로 927억달러로 올 들어 18%나 감소했다.
다급한 인도네시아는 한국 등과 상의 없이 중국과 한국 등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하고 일본과는 기존 협정 규모를 늘려 통화스와프 규모를 40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루피아 약세는 무역수지 흑자와 경상수지 흑자는커녕 오히려 경상수지 적자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기계류 등 중간재 수입금 결제는 달러로, 수출대금 결제는 루피로 하는 게 보통인 탓이다.
2분기 경상수지 적자는 98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4.4%로 역대 최대규모다. 1분기 GDP 2.6%, 58억달러보다 크게 늘어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3분기 경상수지 적자 전망을 GDP의 3.5%로 예상하고 있다.
자본유출도 심각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3분기에 주식시장에서 7억1400만 달러를 순매도했다. 한국에서는 96억달러를 순매수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기업들도 소비자 가격인상, 투자보류 등으로 대응하면서 경기위축을 가속화하고 있다.
시멘트 제조와 자동차 유통을 하는 보소와 코프는 자바섬에 공장을 신축하려던 계획을 최소 6개월 보류했고 남부 술라웨시의 공장 확장을 위해 3억1000만달러의 자금을 차입했지만 기계류와 부품 수입가격이 높아져 은행에 대출을 늘려줄 것을 요청해야 했다. 은행측은 이전 같으면 자동으로 해줬을 대출금 확대를 지금은 계속 심사만 할 뿐이다.에르윈 아크사 보소와 최고경영자(CEO)는 “달러당 1만 루피아 이하에서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모든 기업들은 확장과 사업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소업체들은 타격을 받아 폐점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두부를 비롯한 콩제품을 생산하는 수천 곳의 중소업체들은 급등하는 비용부담을 견디다 못해 일시 폐점했다.
수입업체들은 가격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스타벅스와 바나나 리퍼벌릭과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인도네시아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소매업체인 미트라 아디페르카사는 루피가 달러당 1만2000까지 갈 것으로 예상하고 일부 매장에서 가격을 10% 인상했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를 판매하는 도요타 아스트라 모터스도 가격인상을 검토 중이다.
항공사도 연료비 상승의 타격을 입고 있다. 가루다항공은 요금을 5% 인상한데 이어 2016년까지 항공기를 50% 이상 늘리려던 계획을 루피아 추가 하락시 재검토하기로 했다.
가루다 항공의 자회사인 시티링크 인도네시아도 현 수준의 루피아로는 당초 10대의 에어버스 320대신 8대만 추가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정치권은 내년 선거를 의식해 허리띠를 졸라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따지고 본다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다.인도네시아 정부는 예산의 16% 정도를 극빈층에 대한 연료비 보조금으로 지출했다.
유도요노 정부는 극심한 시위를 불러일으키는 보조금에 손을 대기보다는 유권자 환심을 사기 위해 자바섬과 수마트라를 잇는 길이 29km의 현수교 건설을 위한 여론 몰이를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후반 발생한 외환위기가 인도네시아에서 재연될 것으로는 보지 않지만 해결과제가 산적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IMF는 지난달 30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2013년 연례회의에서 “인플레이션 기대치를 조절하고, 경상수지 적자를 늘지 않도록 규제해 외환보유고를 확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데이비드 카우언 IMF 아태자문관은 “원자재 공급 병목현상을 줄이고 수출을 늘려 중장기적인 경제와 고용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나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을 빼라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행은 대단히 어려운 주문이다.연료 보조금 감축 정책에도 대규모 시위를 벌인 인도네시아인들이 용인할지 궁금하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