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성장 엔진으로 칭송받던 아시아태평양 지역 신흥국들이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이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양적완화를 축소하겠다고 하자 신흥국 증시에 투자됐던 자본이 일거에 빠져나가면서 환율이 급등하고 물가가 치솟으며 성장률이 곤두박질 치고 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보류로 일단 시장 동요는 진정된 것 같지만 미국이 이를 단행할 경우 다시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지지부진한 구조개혁, 정치불안은 신흥시장을 성장의 견인차이자 위기의 뇌관으로 만들고 있다. 신흥시장 위기와 대처 방안 등을 시리즈로 진단한다.<편집자주>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사진위)은 2년여전 인도를 ‘꿈의 시장’이라고 불렀다. 버핏은 2011년 3월 인도 방갈로르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인도는 투자 가치가 있는 거대 시장이며, 신흥시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그리고 인도 보험산업에 투자했다.
그렇지만 버핏의 꿈은 2년여 만에 산산히 깨졌다. 인도는 투자적격국에서 정크(쓰레기) 등급 전락을 목전에 두고 있다. 버핏은 지난 7월 인도 철수를 결정했다.
세계 최대 철강업체인 룩셈셉부르크의 아르셀로미탈과 한국의 포스코는 120억 달러의 투자계획을 철수했고 미국의 소매업체 월마트는 인도 투자 계획을 접었다.
기업의 엑소더스 뿐 아니라 자본도 대량 유출되고 있다. 주식과 채권 등 자본시장에서 126억달러의 자금이 인도를 탈출했다. 가망이 없다고 본 투자자들이 돈을 뺀 것이다.
그 결과 인도 통화인 루피는 사상 최저치로 곤두박질 치고 단기 금리가 급등해 장기금리보다 더 높은 현상도 벌어졌다.
루피는 역대 최저치였던 8월28일 달러당 68.845선에서 상당히 회복해 62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개월 사이에 20% 정도 가치가 떨어졌다.
루피를 급락시킨 주범은 지난해 878억 달러. 국내총생산(GDP)의 4.8%를 기록한 경상수지 적자였다. 올해 인도 정부 목표는 700억달러로 묶는다는 것이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통화가치 하락은 물가급등, 소비지출 감소, 성장률 하락의 연쇄효과를 낳고 있다. 8월 소비자물가 지수 상승률은 무려 9.52% 상승했다.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수입품 가격 상승에다 신선 식품 보관과 유통시설 부족으로 약방의 감초격인 양파 등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국가보조금 지급으로 석유수입이 줄고 있지 않는 점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물가상승은 저소득층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 인구 중 8억2600만명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극빈층이다.
이러니 경제가 좋을 리 없다. 성장률은 매달 떨어져 올해는 지난해 7.6%의 절반을 조금 웃도는 최저 4%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HSBC의 전망으로 근 10년 사이에 가장 낮다. 스탠더드 차터드 은행은 이보다 조금 높은 4.7%를 예상했다, 그렇더라도 3월 말로 끝난 2012회계연도 성장률 5%보다 낮다.
회계연도 1분기(4~6월) 성장률은 4.4%를 기록했다. 2012 회계연도 4분기 성장률 4.8%보다 낮다. 그러나 5월 이후 루피 가치가 20% 가까이 폭락한 만큼 2~3분기 성장률은 이보다 낮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국가 곳간을 풀 수 있을 만큼 재정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다.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탓에 인도의 재정적자는 심각하다. GDP대비 4.9%정도다.
이런 사정 때문에 만기 3개월 국채 금리가 8월 말 12%로 치솟았다. 7월 말에는 만기 2년 국채금리가 10년 만기 국채금리를 무려 2.72%나 웃도는 현상도 벌어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의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내년 5월 치러질 선거를 의식해 전 국민의 70%가 싼값에 식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식품보조금법안을 이달 초 처리했다. 약 200억달러 정도가 국고에서 지출된다. 1992년 외환위기 당시 나라를 구제한 싱 총리도 20여년 만에 표를 의식하는 포퓰리스트로 변신했다는 비판을 받는 대목이다.
인도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 등 쌍둥이 적자와 루피약세, 물가급등, 성장률하락이 그것이다.
그러나 속을 파보면 인도의 고질이 이 뿐이 아님은 금방 드러난다. 공무원 부정부패, 불투명한 거래관행, 느린 정책대응 등 이루 수도 없이 많다. 월마트와 포스코가 등을 돌린 것은 부패한 관료주의 때문이었다.
신흥시장이 안고 있는 공통의 고민거리인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인도 경제를 그로기 상태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크다.
인도 경제가 위기를 맞이한 원인 제공자는 뭐니뭐니해도 인도 정부다. 정부 곳간이 비는데도 보조금을 계속 지급하고 있고 위기가 파도처럼 밀려오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러니 국가 신용등급 강등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를 운용하는 핌코의 신흥시장 담당 롤란트 미에트(Roland Mieth) 수석 부사장은 “주요 신용평가회사 중 한 곳이 향후 12~18개월 사이에 국가 신용등급을 강등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정부가 꿈쩍도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정책 부담은 중앙은행인 인도준비은행(RBI)의 라구람 라잔 총재의 어깨로 넘어갔다. 4일 취임한 그는 20일 기준금리인 재할인율을 7.50%로 0.25% 인상한데 이어 통화정책의 기준 틀을 도매물가지수가 아닌 소비자물가지수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매파’답게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영국 런던의 선 글로벌 인베스트먼츠의 라지 코타리 채권 트레이더는 지난 13일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우리는 몇 년간의 잘못된 재정정책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정부는 거의 아무런 조치도 않는다. 국제 투자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인도에 베팅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도 정부는 외환보유고가 13일 현재 2470억달러에 이르는 만큼 1990년대 초의 외환위기 재발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은 두고 볼 일이다.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루피는 내년 1분기 다시 72루피로 급락할 것으로 점치고 있어 위기재발 쪽으로 추는 기우는 것 같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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