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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박기섭의 '책'

시계아이콘00분 44초 소요

아버지,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어머니,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라는 책/거덜난 책등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


■ 위인전과 평전과 자서전은, 한 인간이 책 속으로 들어가 앉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책으로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애는 오롯한 책 한 권이라 할 만하다. 시인은 아버지라는 책과 어머니라는 책을 다시 펼쳐 본다. 다른 책들은 이 두 권의 부록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아버지는 표지가 울퉁불퉁하고 낯선 곳의 진흙냄새가 나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이 보인다. 간략하게 훑었지만 몇 마디 속에 은밀한 개인사가 숨어들었으리라. 어머니는 갈피가 늘 젖어 있고 면지(面紙ㆍ책의 앞뒤 장 안쪽에 덧대는 종이)가 찢어졌고 목차마저 희미한데 너덜너덜한 책등엔 허연 소금기가 일어나 있다. 삶의 고단함과 남루가 절절하다. 밑줄 친 곳은, 아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이나 오래도록 따라다니는 어린 기억 같은 것이 아닐까. 그걸 떠올리노라면 보풀이 일었다 잦아들고 허기진 그리움이 돋는다. 두 분 가시고 그 실밥 다 터진 책 두 권이 덩그라니 남았다. 하릴없이 뒤적이며, 뒤에 남은 자가 그 위에 더운 눈물을 떨어뜨린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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