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골목길에서 아이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우리방앗간'이란 간판이 걸려 있는 건물 앞에서다.
"엄마, 저 방앗간 우리 거 맞아요?"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우리가 무슨 방앗간을 한다고…. 저건 그냥 저 집주인 거야."
"그런데 왜 '우리방앗간'이라고 적혀 있어요?"
"'우리'는 저 방앗간 이름이지. '우리'랑은 아무 관계가 없는 거고."
"그래도 '우리방앗간'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것'이 아닌 거지? 이상하네."
언어를 말로만 배운 일곱 살 아이가 글을 깨친 뒤 처음으로 겪은 황당하다면 황당하고, 무지하다면 무지한 경험인데,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종종 언어와 사물(또는 언어와 행동)의 불일치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나인 것일까? 왜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내 의식은 왜 내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일까?' '내가 죽으면 내 의식은 어찌되는 것일까? 몸과 함께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타 재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글과 글로 조합된 책(말하자면 '생각의 집')을 읽으면서 소년은 이런 얄궂은 의문에 빠졌던 것인데, 지금도 이따금 '갇혀 있는' 의식 탓에 갑갑해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다들 입만 열면 '소통'을 말하는지라 도대체 소통이 뭔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궁리해보는 것인데…. 각자의 머릿속 생각을 말과 글로 내보여 공유하는 것이 소통이라 한다면 이건 그리 간단치 않은 사태이다. 말과 글이 같아도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같아도 말과 글이 달리 나오기 십상인 탓이다. 사유와 언어가 이럴진대 이를 근거로 빚어지는 행동은 더 가관일 터. 때론 묵언이 최선의 소통일 수도 있을 것이고, 무위가 최선의 행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통을 빙자한 언어의 과잉이 도를 넘으면 폭력이 되고, 이로써 소통은 차단되기에.
글=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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