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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칼럼]'허리우드 클래식'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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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칼럼]'허리우드 클래식'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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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해거름에 종로 낙원상가 4층에 있는 한 극장을 찾았다. 바람이 제법 매서운 날인데도 극장 안은 관객들로 꽤 북적였다. 대부분, 아니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그만그만한 노인들 틈엔 중절모를 외로 쓰고 멋을 낸 할아버지, 빠알간 립스틱으로 한껏 단장한 할머니도 눈에 띄었다. '어르신들의 문화 아지트'로 불리는 실버영화관 '허리우드 클래식'의 속풍경이다.


허리우드 클래식이 문 연지 21일로 만 4년이 됐다. 2009년 첫 해엔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관객이 6만5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입소문이 나면서 경기와 인천 등지에서도 찾아오는 등 해가 갈수록 늘었다. 2010년 12만명, 2011년 15만명, 지난해엔 20만명이 들었다. 좌석이라야 292석, 하루 4회 상영에 불과한 상황에서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객석 점유율이 50%에 가깝다. 웬만한 멀티플렉스 못지않다.

이유가 있다. 경제적, 비경제적 환경을 철저하게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든 때문이다. 우선 요금이 싸다. 55세 이상은 2000원만 내면 된다. 입장료가 싸다고 영화가 형편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25일만 해도 율 브리너와 토니 커티스 주연의 '대장 부리바'다. 상영 예정작들도 '해바라기' '사브리나' '삼포 가는길' '맨발의 청춘' 등 이른바 추억의 명화들이다.


노인들을 위한 배려는 또 있다. 상영관 계단 오른쪽에 손잡이를 설치해 계단을 오르내리기 편하도록 했다. 목요일엔 여성 관람객에게 요실금 팬티도 선물한다. 푸짐한 덤도 있다. 거저 주는 할인 쿠폰을 받아 상가 앞 허리우드 순댓국집엘 가면 4000원짜리 순댓국을 3500원에 먹을 수 있다. 이레 이발관과 남문 떡집은 이발비와 떡값을 500원 깎아준다.

채 1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좋은 영화도 보고 이발도 하고 순댓국도 먹을 수 있다니, 관객이 들 수밖에. 고령의 홍보실장 허 수(65)씨의 자랑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하루에 평균 500명 정도 온다고 보면 돼요. 많을 때는 1000명도 넘구.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하는 4회엔 자리가 없을 때도 많지요."


김은주 대표(39)가 흘린 땀의 결과다. 주변 종묘와 탑골공원 등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에게 적은 돈으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마음 하나로 오늘의 허리우드 클래식을 키웠다. 관객이 늘고는 있지만 입장료가 워낙 싼 데다 영화 구입비와 임대료 등 지출이 만만치 않아 퍽이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만은 가장 행복한 극장주'라는 김 대표다.


서울시와 SK케미칼, 유한킴벌리 등의 지원으로 그런대로 유지는 하고 있지만 자립하기엔 아직 힘이 부친다. 그간 아버지의 도움도 받고, 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개인 돈을 적잖이 털어 넣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문화 복지 공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내친 김에 지난해 11월엔 경기 안산에도 하나 더 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2년 국민 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영화보기(41.4%)를 여가활동의 희망 1순위로 꼽았다. 그러나 노인층의 51%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 영화 한 편조차 맘 편히 보기 어렵다고 했다. 많은 노인들이 경제적 문제로, 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공원이나 노인정에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인 셈이다.


노인들이 적은 돈으로 추억의 명화를 즐길 수 있는 실버영화관은 전국에 세 곳뿐이다. 김 대표 부녀가 운영하는 허리우드 클래식과 안산 명화극장, 서울시가 메가박스에 위탁 운영하고 있는 은평의 '청춘극장'이 전부다. 그나마 '극장을 계속 꾸려 나가겠다'는 김 대표의 약속이 지켜졌으면…. 극장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경선 논설위원 euh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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