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굴지의 다국적제약사들이 한국 시장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다. 토종 제약사들이 경쟁력 있는 신약개발에 성공하며 '그들만의' 전문 영역을 위협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복제약 팔면서 리베이트나 주는 회사들"이라 무시하던 다국적제약사들의 콧대가 위험해졌다.
29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다국적제약사 주도의 전문 치료제 분야에 토종 제약사들이 속속 진출하며 독점 체제를 흔들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백혈병 분야에서 벌어졌다. 이 시장은 2001년 세계 최초의 경구용(먹는) 백혈병약 '글리벡'이 나온 후, 세계적으로 단 2개 제약사가 독점해왔다.
매출액 2000억원 수준의 중소제약사 일양약품이 이 시장에 뛰어든 건 말 그대로 '충격'이다. 일양약품은 '슈펙트' 개발에 성공해 지난 1월 식약청 허가를 받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이용해 비싸게 약을 팔던 두 회사는 일양약품의 반값 작전에 당황하고 있다.
고혈압치료제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보령제약은 2010년 '카나브'를 개발했다. 카나브는 고혈압약 종류 중 ARB에 속하는데, 세계적으로 7개 회사만이 ARB를 보유하고 있다. 다국적제약사들의 각축장에 뛰어든 보령제약은 올 해 200억원 가량 매출을 공언했다. 이 정도면 8개 제품 중 4∼5위 성적이다.
최근 식약청 허가를 받은 LG생명과학의 '제미글로'는 세계 5번째 DPP-IV 계열 당뇨약이다. 첫 DPP-IV 당뇨약 자누비아(미국 MSD)가 2007년 나왔으니, 격차가 5년에 불과하다. 미국-유럽-일본 다음으로 신약개발이 가능한 국가가 한국임을 증명한 셈이다.
세계 1위 제약사인 화이자도 토종 제약사의 도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내 제약사들이 특허소송을 통해 지난 5월 비아그라 특허를 무효화 시키더니,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단순 복제약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세립형, 필름형, 츄형(씹어먹는) 등을 내놓으며 우수한 제형개발 기술도 선보였다.
손지웅 한미약품 R&D본부장은 "불과 4~5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신약개발에서 소위 변두리 국가로서 서러움을 받아온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우리가 생성한 임상자료, 생산시설 등 질(質)이 세계적 수준임을 인정받을 정도로 인식이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제품을 내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기는 아직 이른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한 다국적제약사 관계자는 "토종 제약사들이 세계적 신약 트렌드를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며 "그러나 선진국에서의 허가나 유력 의학저널에 임상시험 결과를 게재하는 등 '권위'를 인정받아야 비로소 다국적제약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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