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 (1939.9)
■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모두 '폐소(閉所)의 자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우물은 윤동주의 북간도 고향 용정(龍井,용우물)과 직결되기도 한다. 나르시소스는 물 속의 그림자가 자신인줄 모르고 결국 뛰어들었지만, 윤동주는 저 우물밑의 그림자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아온, 자기 그림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마음 속에 우물을 파고 그 안에다 자기 이미지를 넣고 다시 바라본다. 윤동주의 고통스런 염결주의는 저 내성적인 자기 훔쳐보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고개를 안으로 꺾고 자책과 자위를 들숨과 날숨처럼 쉬며 지친 발을 내딛던 시인, 1945년 깜깜한 시간의 마지막 벼랑에서 생을 놔버린, 조선의 나르시소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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