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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칼럼]그레이 둠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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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칼럼]그레이 둠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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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저녁 사촌 형제들이 서울 시청 근처의 한 식당에 모였다. 아버지 3형제의 아들 여섯이 석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사촌계' 날이다.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의 건강은 어떠신지로 시작해서 현이는 대학 졸업하면 뭐 한다더냐, 윤이는 곧 제대한다면서, 참 준이는 수능 잘 봤느냐는 등 자식들 얘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안부가 오고 갔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가 왁자지껄했다. '이명박이 한심하다'느니, '박근혜와 안철수가 (대선에서) 붙으면 누가 이길까'라느니,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개의원'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정치, 정치인들을 안주 삼아 떠들썩 술잔을 부딛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세상을 바꾼다고? '그 놈이 그 놈'이지. '세금 도둑들' 욕해 봐야 입만 험해질 뿐. 화제는 '우울한 현실'로 옮겨갔다.

공무원, 기자, 대학교 교직원, 경호업체 직원, 자영업자인 40ㆍ50대 후반의 형제들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다. 명예퇴직 후 비정규직에 겨우 몸을 의탁한 형제, 후배들의 퇴진 압력에 시달리거나 불황으로 사업을 접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형제들까지. 다들 고민이 태산이었다. 재산이라곤 달랑 강북에 전셋집 하나인 데 자식이 대학 재학생이 둘인 형제, 아직 막내가 초등학생인 형제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당장 나만 해도 군 제대 후 내년에 복학할 둘째의 대학 등록금이 걱정 아닌가.


어디 우리 형제뿐이겠는가. 산업 발전에 힘을 보태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경제위기 극복의 중추로서 이 나라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베이비부머.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얼마나 초라한가.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돌보는 책임을 다해 왔지만 정작 자신은 금융위기 이후 퇴물 취급을 받으며 조기퇴직과 구조조정으로 쫓겨나고 집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당하기 십상인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베이비부머는 지금 탈출구 없는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약 712만명으로 추정되는 베이비부머 중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수는 312만명가량. 10년 안에 대부분 정년을 맞는다. 사회 흐름에 떠밀려 조기 퇴직하는 추세로 보면 원하지 않는 은퇴는 더 빨라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노후 준비가 잘돼 있느냐 하면 그도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엊그제 베이비부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베이비부머의 퇴직 후 생활 준비 현황'은 위기론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베이비부머 중 퇴직 이후 노후생활 준비가 돼 있다는 응답은 13.9%에 그쳤다. 반면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응답은 56.3%나 됐다. 퇴직 이후 가장 큰 걱정거리도 '생계ㆍ자녀 교육비 등 경제적 문제(64.3%)'다. 그래서 앞으로도 '10년(49.5%)' '15년(18.1%)'을 더 일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다. 집을 장만하고 부모 부양과 자녀 교육에 희생을 다하면서 정작 자신의 노후 준비에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공적부조인 사회안전망도 믿을 게 못 된다. 베이비부머가 현재 상황에서 노후에 받게 될 평균 국민연금 수령액은 월 45만8000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수도 3분의 1에 불과하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50대의 자살과 이혼이 늘어나고 있다는 수치도 준비 안 된 은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다.


미국 은퇴연구센터의 앤서니 웹 박사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슬로 버닝 크라이시스(slow burning crisis)'라고 했다. 서서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의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위기로 내몰린다는 뜻이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사정이 더 어렵다. 방치했다간 '베이비붐 세대'를 '그레이 둠(gray doom) 세대'라고 불러야 할 때가 올지 모를 일이다.






어경선 논설위원 euh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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